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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1-19 00:00
범민련 결성 20돌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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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결성 20돌을 맞으며

 

올해는 전민족적인 통일운동조직체인 조국통일범민족련합(범민련)이 결성된 지 20돌이 되는 해이다. 남과 북, 해외에서 산발적으로 벌려오던 통일운동을 하나의 조직 밑에 범민족적으로 전개하자는 운동은 이미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이남의 자주. 민주. 통일세력들은 1988 8월 코리아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를 발족시키고 <범민족대회>를 소집할 운동을 벌렸다. 이 추진본부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전대협, 20여개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한편 이북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은 1989 3월 연합회의를 열고 <남북대화를 다방면으로 발전시킬 데 대하여>라는 연합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이남에서 민중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북대화노력을 받아들여 남북사이의 민간급 대화를 다방면으로 벌려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1989 79일 평양에서는 청년축제를 계기로 세계에서 모여든 해외동포들 3,000명과 이북의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국통일촉진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때 미국에서도 100여명의 동포들이 참석하였다. 나도 이때 나의 처와 함께 참석하였고 임수경 학생이 남에서 올라와 그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여기서 조국해방 50돌이 되는 1995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맞이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1990 815일에 <범민족대회>를 열어 남과 북, 해외의 7천만 겨레의 통일의지를 하나로 결집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해외에 있는 통일애국단체들은 <범민족대회 해외추진본부>, <범민족대회 준비 위원회>, 등을 결성하고 1990 6월 베를린에서 제1차 예비접척을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이남 당국의 방해로 해외측 대표들과 북측 대표들만 참석하였다. 이남의 반민족분열세력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범민족대회준비가 순조롭게 추진되어가는 가운데 1990 8월 초 이남에서 <전민련> 대표로 황석영작가가 평양에 도착하였으며 해외 각 지역에서 대표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90813일 백두산에서 역사적인 <조국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의 개막식과 <조국통일촉진 백두-한나 대행진>의 출정식이 거행되었다. 나도 100여명의 미국동포 대표들과 함께 이 역사적인 모임에 참석하였다. 대표들은 백두산을 내려와 평양에 이르러 연구토론회와 평양시 군중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815일 판문점에 이르러 역사적인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이번 범민족대회는 남과 북, 해외의 각계각층의 동포들의 한결 같은 통일염원을 반영한 역사적인 모임이었으며 민족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기 위한 민족대단결 운동이었다.

1990 8 15일에 개최된 범민족대회는 사실상 전 민족적인 통일연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여 주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민족통일연대를 더욱 확대강화하고 남과 북, 해외의 조국통일운동단체들의 활동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상설적인 통일운동 연합체를 내오는 문제가 절실하게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이남에서는 <전민련>을 비롯한 연대연합조직체들이 나왔고 해외에서도 일본, 미국, 캐나다, 유롭, 등 동포통일단체들의 참가 밑에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이 결성되었다.

1990 815일 개최된 제1차 범민족대회에서 남과 북, 해외의 통일애국세력의 연합체로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결성하기로 결정한 그 결의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990 1119일부터 21일까지 베를린에서 남과 북, 해외측 대표들이 참가한 3자 실무회담이 진행되었다. 이남에서는 이해학 목사와 다른 목사 한분, 그리고 해외에 나와 있던 황석영작가가 대표로 참석했고, 이북에서는 전금철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일본, 유롭 등에서 임민식 선생을 비롯하여 지역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미국에서는 이행우 선생과 내가 참석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범민련을 전 민족적인 통일운동기구로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대책들이 토의되었다. 범민련은 코리아반도에서 평화보장을 위하여 남북 상호간의 무기축소, 핵무기 철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변경, 국가보안법 철폐, 남북 간의 화해협력과 자유왕래, 등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과업들이 제시되었다. 실무회담에서는 베를린3자회담의 공동선언문과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채택되었다. 이리하여 1990 1120일 남북, 해외 3자의 연대연합조직인 범민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3자 실무회담에 참가하였던 이남의 이해학 목사님과 다른 목사님은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베를린 3자회담의 결정에 따라 1990 1216일 베를린에서 범민련 해외본부가 결성되었고 1991 125일 범민련 북측본부가 결성되었다. 이남에서는 당국의 심한 탄압으로 1995 2 25일에 가서야 범민련 남측본부가 결성되었다. 남북, 해외 3자가 모두 범민련 지역본부를 갖게 됨으로써 범민련은 명실 공히 전 민족적인 통일운동연합체로서의 조직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범민련은 베를린3자실무회담의 결의에 따라 제2차 범민족대회를 1991 815일 서울에서 개최하기 위하여 투쟁했으나 이남당국의 방해로 판문점과 서울, 도쿄에서 분산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장소는 달랐지만 같은 의제를 토의하고 공동의 문건을 채택한 역사적인 통일협상회의였다. 범민련은 제2차 대회를 마치고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렸다. 1992 815일에는 조국통일범민족 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이 결성되었다.

전 민족적 범위의 연대연합체인 범민련과 범청학련이 결성됨으로써 남과 북, 해외의 3자연대가 확고히 실현되었다. 이리하여 조국통일의 주체역량은 하나의 범민족적인 통일애국역량으로 장성 강화되었다. 범민련은 지난 20년 동안 남과 북, 해외에 지역본부와 지부 등 광범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우리 민족의 화해협력을 실현하고 조국통일운동을 강화 발전시키기 위한 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6. 15통일시대를 가져온 것도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지난 20년 간 줄기차게 통일운동을 벌려온 범민련의 활동 때문이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실로 지난 20년간은 범민련이 제국주의연합세력과 이남의 반통일 세력의 분열책동을 물리치고 해내외 모든 통일세력들을 연대연합의 길로 인도하여 통일운동을 전 민족적 범위에로 강화 발전시켜온 자랑찬 투쟁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힘차게 전진하던 조국통일운동이 엄중한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6.15민족선언과 10.4선언을 전면 부정하고 남북 왕래와 접촉, 교류협력 사업을 모두 차단시켜버렸다. 이 정권은 천안함침몰사건을 조작하여 제국주의연합세력과 연합하여 계속 전쟁연습을 벌려 지금 코리아반도에는 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 정권은 무수한 통일애국세력들을 국가보안법에 걸어 체포 구금하고 있다.

이러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 범민련은 다시 남과북, 해외의 3자연대를 강화하여 6.15민족공동선언의 <우리 민족끼리의 자주정신>을 철저히 이행해 나가야 하겠다. 남과 북, 해외의 온 7천만 겨레가 다시 범민련 두리에 굳게 뭉쳐 전 민족적 범위에서 6. 15민족공동선언과 10. 4선언을 고수, 리행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가야 하겠다.

범민련 결성 20돌을 맞는 올해에 범민련이 조국의 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에 다시 앞장서 나가며 전체 민족통일운동진영의 연대연합을 강화하여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실현하기 위해 힘차게 투쟁해 나가야 하겠다.

 

[작성 :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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