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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07 11:55
결론:<해방신학>을 향하여
 글쓴이 : 최고관리자
 

[결론:<해방신학>을 향하여]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신구약 성경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면서 나는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이며 교조적인 기독교에서 해방하여(Liberation From) 새로운 해방된 사회를 지향하려고(Liberation For) 시도하였다. 그러면 내가 지향하는 해방된 자주적인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나는 그 모델을 <자주의 길>과 <사회주의의 길>을 가는 <정의의 강국> 이북 사회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이미 앞의 서론과 신구약 성서의 재해석 여기저기에서 언급하였다. 사실상 독단적이고 절대적이며 문자주의적인 기독교에서 해방하여 자유스럽게 성서를 해석하는 것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은 말은 많이 하는데 실제로 현실을 바꾸는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고 독일 신학자 몰트만은 잘 지적하였다. 나는 자유주의 교인들이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을 때는 모이는데 열심이었고, 십일조 헌금도 열심히 내었고, 선교도 열심히 하였는데 <신학의 해방>을 통하여 깨어난 후에는 진보적 교회나 사회변혁운동에 열심히 참석하지 않고, 헌금도 후하게 내지 않고, 동지도 열심히 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이북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 대안을 찾게 되었다.

 

나는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기독교의 부흥회와 같은 경험을 하곤 하였다. 도착해서부터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받았고 TV에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감동하여 눈시울을 적시곤 하였다. 이북의 음악을 들으면 꼭 찬송가처럼 내 심장을 때려 나를 울리곤 하였다. 이북의 학자들과의 대화, 여러 곳을 참관하며 만나는 강사들과의 대화, 모두가 나에게 감동을 주어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물론 내용은 이북의 주체사상과 그 사상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생활 속에 실현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해이해진 나를 재생시켜 새로운 결단을 하고 나오곤 하였다. 나는 이러한 이북에서의 경험도 존 듀이가 잘 지적했듯이 <경험의 질>로 볼 때 아주 <종교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 <자주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을 포함한 진보적인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인간의 진보적인 활동도 <종교적>일 수가 있구나!” 하고 나는 감격하였다. 나는 이북에서 <초자연적인 신>을 내세우지 않고도 <종교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적인 방문경험을 통하여 절감하였다. 자기 종교에만 <종교심>이 있다고 믿는 것은 독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수십 차례 이북을 방문하면서 이북이 내가 살아온 자본주의 사회인 이남과 미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곤 하였다. 그 다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나는 항상 궁금해하며 사색을 계속해 왔다. <체제>가 다른 사회에 살면 인간도 달라지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생활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한편 <체제>가 같은 사회에 살면 아무리 개인이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여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색다른 거듭난 삶을 살아보려고 새벽기도도 한동안 열심히 다녀 보았고, 전도도 열심히 해보았으며, 부흥회도 열심히 다녀보았다. 그러나 기도할 때나 부흥회 때 회개하고 결단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교회 밖을 나오면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것을 절감하였다. 현실은 전에처럼 그대로 <물질 화폐 관계>로 냉정하게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교회내에서의 생활과 교회밖에서의 생활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데 고민을 하곤 하였다. 결국, 교회도 그것이 존재하는 <사회의 체제>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 체제에 순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사회의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면 교회 자체가 분열되어 교회가 운영되기 힘들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김정일위원장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는 논문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격적 가치"가 "교환가치"로 전환되고 인간의 인격이 "돈과 재물에 의하여 평가된다"고 지적했는데 참으로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남과 미국에서 살아보니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내부적으로 아무리 고상한 신앙심을 갖고 있거나 고상한 사상을 지닌 사람도 인격이 무시되기가 십상이다. 지금 자본주의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이 갑자기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기들이 돈이 있을 때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친구들도 많았는데 갑자기 직장을 잃자 가장 친한 배우자, 자식들, 친척들, 친구들이 모두 자신들을 무시하고 떠나게 되니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이 땅에 천국 건설을 외쳐왔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은 비인간적인 <사회체제> 자체를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순응하면서 집단구원이 아닌 개인의 <구원>, <기복신앙>에나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기독교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적 요구인 <집단적 구원>, 혹 <사회적 구원>보다는 <사적 소유>에 기초한 <개인주의>를 지향하다 보니 <개인의 구원>에 더 치중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지상에 이상 사회를 건설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덴막의 철인 키엘케골은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인간 각자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주관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사회성>과 <합리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주관을 아무리 강화하여 속에 들어가 보았자 아무것도 없다고 싸르트르는 지적하면서 <사회개혁>, <체제개혁>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장하였다.
 

나는 이북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차츰 서서히 이북의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처음에는 겉모양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처음에 사물의 겉이 보이고 나중에 속이 보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우선 그가 어떤 옷을 입었나를 보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나를 보며, 다음에 어떤 집에 사느냐를 본다. 인간이 <인격>으로가 아니라 <물질>로 평가되도록 사회환경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사귄 다음에야 그 사람의 <됨됨이>, <인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북을 방문하는 재미동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우선 자기들이 미국에서 익숙한 <물질적 가치관>으로 이북사회를 평가한다. 이들은 못산다, 잘산다는 <가치척도>를 <물질, 돈>에다 두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북의 일꾼들에게 재미동포들이 이북을 방문하여 처음에 무슨 비평을 하건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재미동포들이 오랫동안 자본주의 체제에서 <물질화폐 관계>로 사물을 판단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종교와 철학, 사상을 연구해온 학자로 이북을 방문할 때도 항상 이북이 지향하는 <지도사상>이 무엇이며,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관계>는 어떤가,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은 어떤지, <문화종교생활>은 어떤지에 더 관심을 두고 관찰과 사색을 해왔다. 나는 이북에 있는 나의 가족들인 두 고모와 그 자식들(나의 고종사촌들), 그리고 외삼촌과 그 자식들(외사촌들)을 자주 만나고 그곳의 일꾼들과 식당과 호텔에서 일하는 여러 동포를 만나면서 그곳의 인간들 사이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사상과 품성이 어떤지를 세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남과 미국에서 이북의 주민들처럼 그렇게 자본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인간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다른 동물과 다른 원래 인간인 <종족인간(species-being)>을 이북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돈, 자본, 물질 때문에 인간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없었다. 인간이 바로 하늘(인내천)이라고 믿고 인간을 하늘처럼 대하는(이민위천) 이북의 민중 중심의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인간이 상품화될 수 없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우리의 누이들이 미군의 노리개로 딸라에 사고 팔리는 것을 매일 목격하였고 인간의 신성한 노동력마저 값이 매겨져 사고 팔리는 것을 매일 보며 살아왔다. 지금도 서울에서는 쇼 윈도 속에 여성들을 나체로 진열해 놓고 몸을 팔게 하는 공창이 존재한다고 최근 이남 신문에서 읽고 놀란 적이 있다. 유럽에서도 그러한 곳이 존재한다고 한다. 아직도 로스앤젤레스 시의 여기저기에 인간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씩에 노동현장으로 팔려 나가고 있고 그것도 안 되는 사람들은 그날 점심과 저녁을 먹여주는 것으로 팔려 나가고 있다.
 

인간이 상품화되지 않고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 살다 보면 이북에서 내가 목격한 <원초적 인간형>이 나온다고 생각된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소외되지 않은 인간>을 이북의 인간들 속에서 발견한다.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 단지 <생산력>을 높여 자본주의사회보다 더 물질적으로 잘 살자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를 바꾸어 바로 위에 지적한 소외되지 않은 원래의 인간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회주의 이북정권이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사회와 다른  점이 바로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을 민중이 장악한 민중중심의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실시하는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북이 자본주의 사회와 다른 점은 첫째로 인간을 <사유재산>이 아니라 <인격>으로, 즉 <인간의 됨됨이(what he or she is)>로 평가하는 원래의 인간 가치로 되돌려 놓은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원래는 <집단주의적 존재>, 즉 <사회적 존재>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여유식량>이 생기면서 그것을 더 점유한 계급이 생기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면서 <개인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적 소유>의 산물인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는 결국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열되어 소수의 <생산수단>과 <정권>을 장악한 지배계급이 대다수 민중을 착취하고 압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적 소유제도에 근거한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화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한 이북에서는 인간을 <개인적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로 환원시켜 놓았다.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은 인간이란 <개인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지금 민족적 단위, 민족국가 단위로 각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있고 생활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집단을 떠난 개인의 생활이란 사실 불가능하다. 개인은 자기가 혼자, 혹은 핵가족 중심으로 자기가 벌어먹고 살아가고 있으니 집단이 뭐가 필요하며 민족이 뭐가 필요하냐고 말할 수 있으나 인간은 김정일위원장이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에서 강조했듯이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활동하여야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고..., 집단적 협력에 의해서만 자연과 사회를 개조할 수 있으며 자주적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
 

이처럼 이북은 인간의 "본성적 요구"인 "집단주의"를 지향하는 사회, 즉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인간을 이기적이고 뒤틀린 <개인주의적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로 되돌려 놓는 것이 개인주의 사회인 자본주의사회와 다른 점이라고 보겠다. 그리하여 이북에서는 "내 땅, 내 집, 내 공장, 내 농장, 내 도서관" 대신에 "우리 땅, 우리 집, 우리 공장, 우리 농장(협동농장), 우리 도서관(인민대학습당)"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고 실제로 모든 중요한 소유가 민중 전체의 것이다. 이북의 사회주의 헌법 제2장 제20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
물론 여기서 "국가소유는 전체 인민의 소유이다." (제21조)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개인주의>를 낳게 하니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 자체를 사회화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인 <사회성>, <사회적 존재>를 되찾아 준 것은 사회주의 이북사회의 특징이다.

 

둘째로,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데 어떤 사회적 존재이냐 하는 것을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고 지적한 것은 사실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강조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인간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고 밝힌 것은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 처음이다. 인간도 <물질적 존재>이지만 다른 어느 물질적 존재보다도 발전된 유기체를 가지고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뇌수>를 가지고 있어서 사물을 <반영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다른 물질과 달리 <뇌수>가 현실을 반영한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발전된 유기체와 그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뇌수>는 단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갖게 하는 "생물학적 바탕," 즉 <객관적 조건>에 불과하다. 그 자체가 사람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회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사회역사적 과정"에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이 바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고 김위원장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인간이 뇌수의 기능인 "의식을 가지고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본능에 의하여 움직이는 동물과 질적으로 구별된다."고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결국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발전역사"이며 인간은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귀중하고 힘 있는 존재," "세계의 유일한 주인, 유일한 개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렇게 귀중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단지 "물질적 생산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상품으로 매매되는 노동력을 소유한 하찮은 존재"로, 또한 "황금에 의하여 지배되는 무기력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김위원장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이북은 인간을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올바로 정의 내려줌으로써 그동안 착취사회에서 잃었던 <인간의 본성>을 되찾아 주었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대한으로 높여주었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와 다른 두 번째 특징을 갖고 있다.
 

셋째로, 위에서 지적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를 김주석께서 밝혀줌으로써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세계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 해명되었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문제, 즉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내세움으로써 인간의 운명개척의 길을 열어놓았다. 사람의 운명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개척되고 그 운명개척에서 나서는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세계와 사람의 관계문제>로 되기 때문에 세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사람과 세계와의 본질적 관계는 가장 발전된 유기체와 그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뇌수를 가진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주동적인 작용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며, 인간과 세계와의 이러한 상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세계가 각각 어떤 지위를 차지하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경우 그 개조의 합법칙성과 방도를 밝히는 <세계관>을 내놓게 되며,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믿는 경우 <초자연적 신>이나 <자연적 필연성>에 의해 세계와 인간이 창조되고 지배되는 과정을 해명하는 <세계관>을 내놓게 된다. 전자가 이북의 자주적 세계관이고 후자가 지금까지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통해 본 기독교의 구속사관이다.

 

김위원장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에서 인간은 "객관세계를 자기의 요구에 맞게 개조하면서 자기 운명을 자체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는 세계의 주인, 세계의 개조자"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이북은 인간이 <세계의 주인>, <세계의 개조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대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해 주었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건립된 사회주의 국가인 이북은 "사람에 대한 주체적 관점과 입장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하여 복무하게 하며 모든 문제를 사람의 창조적 역할을 높여 풀어나가고 있으며," 또한 이북은 "사람의 자주성을 철저히 보장하며 사람의 사상의식과 창조적 능력을 빨리 높이고 그것을 적극 발양시킴으로써 세계의 주인, 세계의 개조자로서의 사람의 지위와 역할을 비상히 강화하고 혁명과 건설을 다그쳐나가고" 있다고 김위원장은 강조하였다.
 

이처럼 이북은 인간을 <순수한 정신적 존재>로 보는 <종교적, 관념론적 세계관>과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중심의 세계관>, 즉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중심으로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입장을 확립해 줌으로써 인간의 <운명개척의 길>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넷째로, 이북은 이러한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에 기초하여 민중 중심의 <새로운 역사관>을 인류에게 제공해주었다. 이북의 사회주의 헌법은 제1장 제8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제도는 근로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고 있으며 사회의 모든 것이 근로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람 중심의 사회제도이다. 국가는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되어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된 노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며 보호한다."
 

지금까지 착취와 억압을 받아 온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며 변혁의 주체라는 사상은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과학적으로 밝힌 독특한 이북의 <주체의 사회역사원리>이다. 주체의 사회역사원리는 우선 역사의 주체인 <근로민중>을 중심에 놓고 역사발전과 사회변혁운동을 고찰한다. 지난날 사회역사의 발전에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관계를 기초적인 문제로 삼고 그 어떤 <정신적인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내세운 사회 역사관은 초자연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중심에 놓고 전개한 <관념론적 사회 역사관(예:기독교의 구속사관)>이다. 한편,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관계를 근본문제로 삼고 <물질 경제적 여건>을 일차적인 것으로 내세운 사회 역사관은 물질 경제적 여건을 중심에 놓고 전개한 <마르크스스주의의 유물사관>이다.

 

유물사관은 모든 사회역사적 현상의 본질과 그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을 <물질 경제적 여건>에 기초하여 밝히며 <물질 경제적 관계>를 중심에 놓고 사회역사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다. 이 유물사관은 사회역사적 운동을 그 주체인 민중의 "주동적인 작용과 역할에 의하여 발생 발전하는 주체의 운동”으로 본 것이 아니라, 주로 “물질 경제적 요인에 의하여 변화 발전하는 자연사적 과정"으로 본 역사적 제한성을 갖고 있었다고 김정일위원장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에서 진단하고 있다. 유물사관의 원리에 의하면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력이 발전하면 할수록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불상용적 모순과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사이의 적대적 모순이 격화되고 노동계급을 비롯한 <혁명역량>이 장성 강화되며 따라서 혁명이 더욱더 성숙”되어 가는 것으로 된다. 그러면 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격화되어 적대계급 사이의 계급적 모순이 심화한 미국, 영국, 독일, 일본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변혁이 성공하지 못하였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김정일위원장의 분석에 의하면 변혁투쟁에서 <객관적 조건>인 <물질 경제적 요인>이 중요한 작용을 하지만 변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은 "객관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를 어떻게 강화하고 그 역할을 어떻게 높이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선행 유물사관은 변혁투쟁에서 <물질 경제적 요인>을 기본으로 보면서 <변혁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이는 문제를 변혁의 근본 방도로 제기하지 못하였다고 김위원장은 분석하고 있다.

 

지난날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객관적인 물질 경제적 조건>에 결정적 의의를 부여하고 <생산력>의 발전에만 전력하면서 민중의 <사상개조사업>을 통한 <인간개조사업>을 중시하지 않고 변혁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이는 사업을 소홀히 하여 결국에는 붕괴하고 말았다고 김위원장은 분석하고 있다. <생산력(productive force)>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능력>, 즉 <혁명력(revolutionary force)>의 강화가 더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아무리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모순이 격화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계급적 대립>이 심각하더라도(객관적 조건이 성숙하더라도) 혁명을 담당할 <사람들>이 준비되지 못하면, 즉 <혁명역량>이 준비되지 못하면 혁명이 성공될 수 없다는 결론이다. 변혁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모든 운동의 실패를 먼저 주체에서 찾지 않고 객관적 조건에서 찾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새로운 <인간관>과 그러한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대하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민중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고 모든 것이 민중을 위하여 복무하며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 발전한다는 <사회 역사관>을 확립한 이북은 민중을 "수령과 당의 두리에 조직 사상적으로 튼튼히 결속시켜 변혁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이는 사업을 기본고리로 틀어쥐고 나감으로써" 오늘날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끄떡하지 않고 주체사회주의를 고수하고 강화 발전시키고 있다고 김위원장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천대와 멸시만 받아 온 민중을 <역사의 주인>, <역사의 주체>로 높이 끌어올렸다는 것이 이북 주체사회주의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다섯째로, 이러한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 사회 역사관에 기초하여 이북은 인류사상 처음으로 <사랑과 믿음의 정치>, <인덕정치>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북이 다른 사회와 구별된다. 위에 지적한 인간관과 세계관, 사회 역사관에 기초한 사회주의 나라를 건설한 이북에서만이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 객관적 조건이 조성되었다고 보겠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이 결국 <국가주권>도 장악하고 민중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민중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말할 수 없다. 김위원장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에서 "사회주의제도가 서면 계급적 대립이 청산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대립과 불신의 관계로부터 사랑과 믿음의 관계로 전환된다"고 지적하였다.
 

인간 중심의 인간관과 세계관, 민중 중심의 역사관에 기초하여 세워진 사회주의사회인  이북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동지적 단결과 협조,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가장 훌륭히 구현하며 정치도 사랑과 믿음의 정치," "인덕정치"로 전환되었다고 김정일위원장은 밝히고 있다. <사랑과 믿음>, 이것은 민중이 "정치의 대상으로부터 정치의 주인"으로 된 사회주의 이북사회에서 "정치의 본질"을 이룬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북사회에서는 동지적 사랑과 믿음이 사회적 집단과 그 성원들 사이, 사회의 개별적 성원들 사이에 꽃펴나며 그것은 "수령과 전사들 사이에서 가장 숭고하게 발현된다"고 김위원장은 밝혀주었다. 수령과 전사, 당과 민중이 <동지적 사랑>과 <혁명적 의리>로 결합하고, 수령, 당, 군대, 대중이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으로 일심단결하여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어 모든 사회성원들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끝없이 빛내 나가는 삶이 가장 <값 높고 아름다운 삶>이며 그것을 실현한 사회가 가장 공고하고 생활력 있는 사회"라고 김위원장은 지적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이란 종교에서나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으나 사회주의 이북사회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내 심장을 마구 쳐 울리던 그 원인이 바로 이러한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에 근거한 인간관계였고 그에 바탕을 두어 <인덕정치>가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는 "금권과 결합한 가혹하고 교활한 억압정치, 약탈정치"를 실시하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아무리 기독교회가 많아도 실현될 수 없다. 그러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 동지적 관계는 오로지 사상과 뜻을 같이하는 사회 정치적 집단, 사회주의제도에 속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이북의 수령과 일군들, 모든 당원은 자기 자신보다 민중을 먼저 생각하고 민중의 기쁨과 아픔을 자기의 기쁨과 아픔으로 여기며 고생은 먼저하고 복락은 뒤로 미루며 어려운 일은 스스로 맡아 하고 성과는 남에게 양보하는 참된 인간들이라고 김위원장은 지적하였다. 이북의 모든 사회 성원들은 서로 믿고 사랑하고 도우면서 화목한 대가정을 이루고 다 같이 삶의 보람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그는 자랑 넘쳐 말하였다.
이것이 기독교가 세우려고 했던 이상사회가 아닌가!
 

이처럼 이북은 민중을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온갖 사랑과 배려를 아낌없이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인덕정치>,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세계사에 유례없는 이상사회의 본보기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 이북사회가 다른 사회와 다른 특징이다.
 

여섯째로, 이북은 이러한 사람, 민중 중심의 사회주의, 사랑과 믿음의 정치, 인덕정치를 실시하는 이상적인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려는 제국주의와 그와 연합한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특별한 사회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름이나 있는 학자들이 마치 사회주의 나라들이 어떤 반대세력이 없이 <진공상태>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다 사회주의 변혁이론이 잘못되어 실패한 것처럼 말장난하는 것을 종종 본다. "너희들이 사회주의가 이상이라고 생각하니 한번 네 마음대로 맘껏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해 보라"고 내버려 두고 제국주의 연합세력들이 사회주의 국가들을 전혀 간섭하지 않고, 군사적으로 위협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봉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다가 사회주의 사상 자체에 모순이 있어 망한 것처럼 잘못된 논리를 전개하는 순진한 학자들이 있다.

 

사회주의 혁명은 생산수단과 국가 주권을 장악한 민족 내부의 기득권계급과 외부의 제국주의 연합세력과의 치열한 대결 속에서 진되어 왔다. 더구나 이북처럼 작은 사회주의 나라들은 핵무기를 비롯한 신무기들로 무장한 제국주의 연합세력들과 대결하면서 자주국방을 이룩해야 했기 때문에 국방산업에 엄청난 재부를 쏟아부어 민중경제건설에 필요한 수천, 수만 개의 공장을 지을 수 없었고 민중의 배를 불릴 수 있는 식량을 사들이는 일을 중단해야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내적으로 생산수단과 국가 주권을 민중이 장악하고 외적으로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계속 혁명을 하여야만 하였다. 이 땅에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한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김위원장은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사랑과 믿음의 정치, 인덕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주의제도를 지키기 위한 혁명은 인간에 대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혁명이란 바로 인간의 생명인 <자주성>을 위한 민중의 투쟁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에 대한 <최대의 사랑>으로 된다고 말했다. 온갖 구속과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고 참된 인간으로 완성해주며 민중을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되게 하여주는 혁명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최대의 사랑이라는 것이 김위원장의 고견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이남 사회나 미국사회에서는 국가가 폭력적 방법으로 변혁세력들, 자주성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을 탄압하고 구속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자주 목격하였다. 그러나 이북은 법적으로 사회주의변혁을 지지하고 있다. 이북의 사회주의 헌법 제1장의 제1조와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반대하며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혁명투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은 혁명적인 국가이다."
 

이처럼 이북은 어떠한 외세의 지배도 허용하지 않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로서 사회주의를 고립 말살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제국주의 침략세력들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혁명적인 국가>이다.
 

이북에서 1994년 김일성주석 서거 후 제국주의 연합세력의 군사적 압살정책, 경제봉쇄, 정치적 고립화 정책은 극에 달하였고, 1995년부터 몇 해째 계속 홍수와 가뭄, 해일 등 자연재해까지 겹쳐 혹심한 식량난과 연료난, 동력난으로 이북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해야 하였다. 이러한 엄혹한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제도를 지키기 위하여 이북은 최고로 정예화된 집단인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핵심역량>으로 내세우고 그들의 결정적 역할에 의거하여 사회주의 제도와 민족, 민중의 자주성을 옹호 고수하고 실현해 나가는 정치방식인 <선군정치>를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민중들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군사>를 국사 중의 국사로 첫 자리에 놓고 국가의 노선과 정책을 작성하고 혁명군대를 사회의 그 어느 집단보다 먼저 최고의 정예부대로 만들며 국방력 강화에 최우선적 힘을 넣는 <선군정치>야말로 인간에 대한 최대의 사랑이라고 김위원장은 강조하였다. 사회주의가 망하면 소련과 동구 나라들 처럼 민족과 민중의 자주성은 유린당하고 사랑과 믿음의 정치가 불가능해져서 사회주의를 지키는 혁명보다 민중에 대한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현재 이북에서는 군대가 <혁명의 기둥>, <혁명의 주력군>으로서 민중의 생명인 <자주성>과 <사회주의>를 옹호 고수하고 사회주의의 위업 수행과 완성을 위한 투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온 민중이 군사를 중시하고 군대를 사랑하는 기풍이 널리 퍼져 있다.
 

자본주의 나라들에 사는 사람들은 이북을 가리켜 <독재국가>, 혹 <전체주의국가>라고 비판하고 있다. 생산수단과 국가 주권을 장악한 지배계급을 지원하는
파쇼독재체제인 <전체주의 국가>와 민중의 자주성 실현을 위한 <집단주의>를 실시하는 나라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오해이다. 이북은 사회주의 헌법 제1장 제12조에서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국가는 계급 노선을 견지하며 <인민민주주의독재>를 강화하여 내외 적대분자들의 파괴책동으로부터 인민주권과 사회주의제도를 굳건히 보위한다."
 

이북은 민중의 주권과 사회주의제도를 지키기 위하여 그것을 반대하는 내부의 적대세력과 외부의 제국주의 연합세력에 대하여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실시하지만, 민중에 대해서는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민민주주의 독재>는 민중 중심의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려는 내외의 적들이 존재하는 한 계속된다는 것이다. 소수의 기득권자인 지배계급을 위하여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파쇼독재>와 민중 중심의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시행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똑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나라들이 다 붕괴한 상황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혁명적인 자주적 사회주의국가>인 이북은 인류 희망의 등대로 되고 있다. 이북은 영토도 아주 작은 나라이고 인구수도 적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수령, 당, 군대, 대중이 하나의 사상, 즉 주체사상으로 일심단결하여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즉 주체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강적이라도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제국주의 연합세력들이 김주석 서거 후 이북을 고립 압살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이북의 수령, 당, 군대, 대중이 일심단결하여 주체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코리아 반도에서 핵전쟁이 억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민족사와 세계사에 주는 교훈은 크다고 본다.
 

이북의 공민들은 민족과 민중의 자주성과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비록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생명인 자주성을 투철하게 견지하고 있으므로 높은 인간적,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운명의 당당한 주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나는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이러한 현실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세상에 이러한 나라도 있구나 생각하며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나는 이북의 민중 속에서 내가 오랫동안 갈망하고 추구해온 <혁명의 종 그리스도상>을 마침내 찾아내었다. 
 

나는 자주 목사로서, 종교인으로서 어찌 이북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느냐, <목사>라는 이름을 떼고 그러한 짓을 하라는 등의 질책과 권고를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북이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그러한 <사랑과 믿음의 정치>, <인덕정치>를 현실 속에서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북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이북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이러한 인덕정치를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나는 사랑과 자비, 평화, 자유, 인간구원을 부르짖는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이 사회주의사회에 더 잘 어울린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왜 많은 기독교인이 사회주의를 <종교의 적>, <적그리스도>로 간주하고 대결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북을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들은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시행할 수 있도록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국가 주권>도 민중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주의 제도를 이해하지 못한 초기의 종교인들이 쓸데없이 사회주의 정권을 <적그리스도>로 몰고 대결함으로써 박해를 받은 것이지 사회주의 정권이 종교 자체를 거부한 것도 아니고 종교의 자유를 제한한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나 사회주의는 그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인간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양자는 모두 방법은 다르나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높여 인간을 존엄 있는 존재로 만들자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심지어 일부 종교는 죽은 다음에도 천당에서 대우를 받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 양자는 서로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나는 비록 해외에 사는 동포이지만 인류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맨 앞자리에 분단된 우리 민족이 있고 그 앞에 사회주의 이북이 당당하게 서서 인류의 나아갈 길, 즉 인류의 자주성 실현의 길, 인류 사랑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나도 그러한 진리의 길에 동참하고 있다.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세계를 정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지금 십자가를 지고 휴전선이라는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며 피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분단된 조선민족이 마침내 조국을 통일하고 통일된 조국에서 사랑과 믿음의 인덕정치를 실시하는 날 인류는 우리 통일된 조국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평화의 세계, 사랑과 정의가 흘러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내가 <신학의 해방(Liberation From)>을 넘어 <해방의 신학(Liberation For)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신학의 해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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