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8-18 12:52
2부:새로운 역사관(상)
 글쓴이 : 최고관리자
 
[2부] 새로운 역사관(상)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앞의 새로운 사회관에서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주로 사회의 본질과 구조와 관련된 문제들을 중심으로 토론하였고, 2부의 새로운 역사관에서는 그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으로서의 역사과정을 주로 논하려고 한다. 사회가 하나의 물질적 존재라면 역사는 그것의 운동이라고 보겠다. <사회의 운동> <역사>이기 때문에 사회와 역사를 붙여서 <사회역사>라 부른다.
 
앞의 사회관에서 본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오로지 <객관적인 면>에서만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도 자연과 같이 <물질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사회발전 과정에서도 자연에서와 같은 <필연성>이 관통되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발전 과정도 어디까지나 <자역사적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 자신은 역사관을 설명하면서 언제나 자기의 근본입장은 사회발전 과정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역사를 <자연사적 과정>으로 본다는 의미는 자연에서와 같은 <객관적 과정>, <자연적 필연성>과 같은 필연적인 과정으로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물론 사회도 하나의 자연과 같은 <물질적 체계>이고 또한 사람도 <객관적 존재>의 면이 있기 때문에 역사발전 과정을 객관적인 면에서 파악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또한 그것은 과학적 역사관의 중요한 구성내용으로 된다.
 
그런데 사회적 운동의 담당자인 사람은 <객관적 존재>인 동시에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주체적 존재>이다. 따라서 사회역사 운동은 <객관적인 면>과 함께 <주체적인 면>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역사관을 올바로 확립하기 위하여서는 역사발전 과정을 <객관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체적인 면>에서도 파악해야 한다. <객관적인 면> <주체적인 면>에서 동시에 파악된 역사관이라야 역사과정에 대한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는 <주관주의적 역사관>, <관념론적인 역사관>을 반대하는 데 주되는 화살을 돌리면서 역사이론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역사과정을 <객관적인 면>에서 파악하는 것만이 과학적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역사과정을 파악하는 것도 마치 관념론적이며 주관주의적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미 앞의 사화관에서 본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과정을 <물질적인 것> <관념적인 것>, <객관적인 것> <주관적인 것>으로 구분해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존재><사회적 의식>의 관계를 기초에 놓았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과정을 고찰할 때 언제나 <물질적인 것> <관념적인 것>, <객관적인 것> <주관적인 것>으로 구분해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를 자연과 공통되는 <물질적인 면>에서만, 또한 인간의 의식 밖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인 면>에서만 파악하는 것을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 이외의 것은 관념적인 면, 주관주의적인 면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것으로 보고 마치도 <물질적인 존재>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를 고찰하는 것 조차도 주관적인 것, 관념적인 것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간주했다.
 
그런데 위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인간은 <관념>도 아니며 <주관>도 아니다. 인간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것은 결코 <관념적인 것>이나 <주관적인 것>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것>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적인 것> <주관적인 것>을 올바로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체적인 것> <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물질적인 것>이다. <주관적인 것> <의식을 통과하는 것>이며, 따라서 <관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것> <주체적인 것>의 한 측면, 계기로 된다. 다시 말하면, <의식>, <주관> <인간>, <인간적인 것>의 한 측면, 한 계기로 된다.
 
그런데 오래 동안 철학적 사유에서는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의 관계가 기본문제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현상을 구분하는 데서도 <물질적인 것> <관념적인 것>, <객관적인 것> <주관적인 것>이 기본문제로 제기되었다. 이런 이유로 <객관적인 것> <주체적인 것>은 사회적 과정을 구분하는 범주로 사용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대다수의 서방 언어들에서 <주체> <주관>은 같은 용어로 표현되어 왔다. 그 둘은 다 같이 영어로 <subject>로 표현되어 왔다.
 
<주체> <물질적 존재> <사람>이지만, <주관> <의식을 통과하는 것>, <관념>이다. 그러나 오래 동안 <물질과 의식>을 철학의 근본문제로 간주해온 사고방식이 지배해 왔기 때문에 <주체> <주관>은 많은 경우에 서로 구별되지 않고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 둘을 표현하는 언어도 같은 용어로 쓰이고 있다. 주체철학에 와서 비로소 <주체>와 주관>이 명확히 구별되었고, 동시에 <주체적인 것> <주관적인 것>의 범주도 구별되었다.
 
역사관을 올바로 확립하려면 사회과정, 역사과정을 고찰할 때 단순히 <물질적인 것> <관념적인 것>, <객관적인 것> <주관적인 것>을 구분할 뿐 아니라, 마땅히 <객관적인 것> <주체적인 것>도 구분하여야 한다. 주체사상은 사람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주체적인 면>을 위주로 하면서 여기에 <객관적인 면>을 결합시켜 역사관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주체적인 면>이란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활동의 면을 말한다. <객관적인 면>이란 <객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활동의 면과 사회생활의 변화발전의 면을 포함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을 위주로 하면서 여기에 <객관적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을 결합하여 역사관을 전개해야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다는 것은 곧 <주관주의 적인 것>, <관념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또 그것은 <관념>, <정신>, <의식>으로서의 <주관>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것은 <주체적인 것>, <물질적 존재>로서의 <사람>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관념론으로 될 수 없다.
 
다음으로 <객관적 존재의 면>에서만 역사과정을 파악하는 것이 일면적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객관적 존재>임과 동시에 <주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려면 <객관적인 면>과 함께 동시에 <주체적인 면>을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와 역사를 주로 <객관적인 면>에서 파악했다. 이것은 결국 자연과 사회의 물질적 공통성의 견지에서 사회의 발전과정을 파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연과 사회의 물질적 <공통성의 면>에서 사회의 발전과정을 파악한 다음에는 이에 기초해서 자연과 사회의 <차이성의 면>에서도 사회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인식발전의 요구로 나선다. 자연과 사회의 발전에서 근본적 차이란 자연에는 <주체>가 없지만 사회에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의 운동은 사물들의 맹목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사회적 운동은 <주체> <주동적인 작용>에 의해서, 즉 주체의 <의식적인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는 점에서 그 근본적 차이가 있다. 따라서 주체의 <주동적인 작용>, 주체의 <의식적인 활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을 파악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발전시키는 데서 필연적으로 나서는 요구로 된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역사관인 주체사관은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확립하였다. 주체사관에서 사회적 운동을 <주체의 운동>으로 파악한다고 할 때 여기에 두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사회적 운동을 사람들의 <요구와 이해관계의 실현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운동은 다 사람들의 일정한 요구와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다. 일정한 사회적 운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일정한 요구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일정한 요구와 이해관계를 떠난 사회적 운동이란 존재할 수도 없고 발생 발전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일정한 계급이나 계층, 집단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떠난 사회적 운동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사회적 운동을 <주체의 운동>으로 파악할 때 첫째로 지적해야 할 문제는 사회적 운동이 사람들의 일정한 요구와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두번째 의미는 사회적 운동이 목적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사람들의 <창조적 힘>에 의해서 추동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자연의 운동은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의 힘에 의해서 추동되어 나간다. 그러나 사회적 운동은 언제나 목적의식적으로 자기의 힘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창조적 힘>에 의해서 추동되어 나간다. 이것이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의 두 면이다.
 
이 두면은 사회적 운동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적 사건, 사변을 분석할 때도 언제나 방법론으로 나서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모든 운동, 사건, 사변이 누구의, 어느 집단의, 어느 계급의, 어느 민족의 요구와 이해관계와 결합되어 있으며, 또 이러한 요구와 이해관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교차되며, 어떻게 합치되고 대립되는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첫째로 중요한 방법론으로 나선다.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러한 역사적 사건, 사변을 <추동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 누구의 힘에 의해서 그것이 추동되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해관계의 분석> <역량관계의 분석>, 이 두가지 방법론이 사회적 과정을 분석하는 주되는 요구로 나선다.
 
이처럼 주체사관에서는 그러한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의 두가지 징표를 염두에 두고 <이해관계의 분석> <역량관계의 분석>  사회적 과정을 분석하는 주되는 방법론으로 제기되고 있다. 사회적 운동을 객관적인 면에서 객관적인 운동으로만 파악하게 되면 그러한 역사적 운동, 사건, 사변들이 객관적이고, 인간의 의식 밖에 독립해 있고, 거기에 자기의 객관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등의 방법론은 나올 수 있지만 그 운동, 사건, 사변들의 방향과 목적을 규정하는 요구와 이해관계의 분석, 그것을 추동하는 <추동력>에 대한 분석 자체는 전면에 나서지 못한다. 왜냐면 사회적 운동을 단지 <객관적인 운동>으로만 파악하게 되면 역사적 운동, 사건, 사변들이 어떠한 <객관적 요인>에 의해서, 어떠한 <객관적 모순>에 의해서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에만 주된 관심을 돌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와 역사를 <주체의 운동>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사회역사를 분석하는 올바른 방법론을 정립하는 데서도 보다 깊은 지도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으로 된다. 또한 이러한 분석은 역사적 운동, 사건, 사변들을 이해하는 과학적이고 심오한 것으로 된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체사관이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역사 운동을 내세우고 있는데 거기에는 <객관적 법칙>이 없기 때문에 <객관성> <합법칙성>이라는 범주가 탈락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주체사관이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역사 운동을 강조하고,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역사 운동의 법칙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데 거기에는 <객관적 법칙>  없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역사 과정을 주관주의화 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사회역사 분석과 인식에서 <객관성> <합법칙성>이라는 방법론적 범주를 버리는 것이라고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잘못된 주장은 <역사법칙>, <사회발전 법칙>에 대한 일면적이고 피상적인 인식과 관련되어 있고, 또한 주체사관에서 내세우고 있는 <주체의 운동법칙>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법칙의 중요한 징표는 <객관성>이다. <객관성>, <일반성>, <반복성>, <필연성>은 모든 법칙의 중요한 징표들이다.
 
오래 동안 사람은 곧 <주관>으로, <의식의 대변자>로만 파악되어 왔기 때문에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활동 자체에는 객관적 법칙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하여 사람은 단지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에 작용하는 <객관적 법칙>을 자기 활동을 통해서 실현할 뿐이라는 이해가 지배적이었다. 유물사관도 본질상 이러한 이해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객관적인 사회발전 법칙의 요구가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은 자기활동을 통해서 자기의 의식 밖에 있는 <객관적 법칙>을 실현하는 존재, 법칙의 요구를 관철하는 존재로만 문제를 세웠다. 마르크스주의는 여기에 머무르고 그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사회발전 법칙의 작용과정에 <의식의 요소>가 개입돤다는 사실을 인정한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이 법칙은 의식 밖에 그와 독립해 있는 , 즉 인간 밖에 그와는 독립해 있는 <객관적 법칙>의 요구를 관철하며, 법칙의 요구를 실현하는 존재로만 인간을 보았다. 결국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인간> <사회법칙>의 주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법칙> <인간>의 주인으로 되어버린다. 법칙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인간은 단순히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에 작용하는 객관적 법칙의 요구를 실현하는 존재로만 일면적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인간> <객관적 법칙>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법칙>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지난 시기 주로 인간 밖에 있는 객관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 즉 그들 사이의 일반적이고,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들만을 주로 역사발전 법칙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다 보니 인간 자체는 법칙을 이루게 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로 될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의식>, <관념적 요소>는 법칙의 어떤 요소로도 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편향이 생겨났다.
 
그런데 역사발전 법칙을 좀더 전면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인간 밖에 있는 물질적 요소들 사이의 법칙, 인간과 객관적인 물질적 요소들 사이의 법칙, 인간의 관념적 요소와 객관적인 물질적 요소 사이의 법칙, 그리고 인간의 관념적 요소들 사이의 법칙, 등 다양한 법칙의 형태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 요소가 물질적인 것이든, 관념적인 것이든, 그리고 그 요소가 인간이든, 객관 세계든, 거기에 작용하는 관계가 객관적이고, 필연적이고, 본질적이고, 반복적일 때는 그것들이 다 법칙으로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과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과의 상호 관계에 작용하는 법칙은 역사발전 법칙으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주체사관은 역사발전 법칙을 논할 때 기본법칙으로서 크게 두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사회의 주인이며 역사의 주체인 사람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발전하는 데 맞게 사회적 재부가 창조되고 사회관계가 개선되어 나간다는 법칙이다. 사람이 사회를 이루는 구성요소들 가운데서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발전하는 데 맞게, 즉 사람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수준>에 맞게 사회적 재부가 창조되고 사회관계가 개선되어 나가는 것이 법칙이다. 사실상 사회적 재부 자체가 자주성과 창조성이 객관화된 것, 즉 인간의 창조물이다. 사회관계도 역시 인간의 창조물이고 인간에 의해서 개변된다. 그러니까 창조자인 인간의 발전수준에 맞게 사회생활의 객관적 조건을 이루는 사회적 재부와 사회관계가 개선되어 나간다. 이것은 인간을 한편으로 하고 사회생활의 객관적 조건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사이의 객관적이고, 필연적이고, 일반적이고, 반복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역사발전 법칙이다. 따라서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법칙>, 즉 주체인 인간이 사회생활의 객관적 조건, 즉 사회적 재부와 사회관계를 개조하고 개선해 나가는 법칙은 객관적 법칙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심지어 그것은 법칙이 될 수 없다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다음으로, 주체사관에서 중요한 법칙으로 들고 있는 것은 이미 1부에서 다루었듯이 <자연개조>, <사회개조>, <인간개조>의 상호관계에 대한 법칙이다. 이 삼대개조의 법칙성을 분석적으로 보면 세 측면이 있다.
 
하나는 <기원의 견지>, <형성, 발생의 견지>에서 보면 <자연개조>의 성과에 기초하여 <인간개조>가 진척되고, <자연개조> <인간개조>가 이루어지는 데 맞게 <사회개조>가 발전되어 나가는 합법칙성이다. 이 삼대개조를 기원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도 사회도 자연으로부터 우선 에너지를 가져와야 생존이 가능하다. 사회 자체가 에너지를 가져올 수 있는 원천은 자연이다. 그러니까 기원의 견지에서 보면 먼저 자연을 개조하여 자연의 에너지를 사회화 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도 역시 자기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물질적 기초, 밑천을 가질 수 있다. 이에 기초하여 인간이 개조되면 자연개조와 인간개조의 성과에 기초해서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이 더 합리적으로 규제되어 나가는 사회관계의 개조사업이 진행될 수 있다.
 
두번째 측면은 <기능과 역할의 견지>에서 본 합법칙성이다. 즉 모든 개조사업에서 언제나 <인간개조>를 앞세우는 것이 합법칙성이다. 자연을 개조하는 담당자도 인간이고, 사회를 개조하는 담당자도 인간이다. 또한 인간 자체를 개조하는 사업의 담당자도 역시 인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조사업을 기능과 역할의 견지에서 보면 언제나 <인간개조>가 선행되는 것이 합법칙성으로 된다. 그러므로 자연개조를 잘 하자면 자연개조를 하기 위한 인간개조를 잘 해야 한다. 즉 자연개조의 역량을 잘 준비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생산자들의 창조적 능력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즉 자연개조에 종사하는 일꾼들의 사상의식도 높이고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역량도 높여야 한다. 사회개조를 하는 데 있어서도 사회개조를 담당하는 일꾼들, 주로 정치일꾼들을 잘 준비시켜야 한다인간개조를 잘 하기 위해서도 인간개조를 담당하는 문화 일꾼들, 교육 일꾼들, 사상 일꾼들을 잘 준비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이 삼대개조에서 어느 개조를 하려고 해도 먼저 인간개조를 선행하는 것이 법칙성으로 된다. 왜냐하면 모든 개조의 실체, 주체는 인간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기능과 역할의 견지>에서 <인간개조>를 선행해 나갈 때, 매 개조사업마다 인간개조를 선행하면서 이 삼대개조사업을 <균형적으로,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삼대개조사업을 <균형적으로,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사회발전을 위한 합법칙적 요구로 된다. 다시 말하면, 이 삼대개조사업은 사회생활이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된다. 앞에서 이미 강조했듯이 사회가 존재하고 역사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자연을 개조하여 물질적 부를 창조해야 되고, 사회관계를 합리적으로 부단히 개선해 나가야 되며,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담당자인 인간을 계속 생산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 영역은 사회의 존립과 발전에 필수적 조건으로 된다.
 
이 삼대개조 사업중  어느 하나라도 경시되거나 소홀히 되어서는 안된다. 이 세 영역이 균형적으로, 조화롭게 진행되어야 사회발전이 우여곡절 없이, 그리고 편향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 질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악은 <물질생활의 기형화>, <정치생활의 반동화>, <정신문화생활의 빈궁화>이다. 오늘날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을 개조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자연개조사업>은 아주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 상응하게 <인간개조사업>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된 물질적 부가 비인간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즉 마약, 알코올 중독, 각종의 변태적 욕망충족 행위들, 등과 같은 기형적 소비, 기생적 소비가 만연되어 있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개조사업은 발전되어 생산력은 증가되었지만 인간개조사업이 그에 상응하게 발전되지 못한 이유로 빚어진 결과이다.
 
한편 사회주의 사회는 위에 언급한 사회악을 모르고 균형적으로, 조화롭게 발전해 나가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는 자연개조사업에만 힘을 집중하지 않고 인간개조사업에도 힘을 돌려 교육, 문화, 과학의 발전에 큰 성과들을 거두고 있다. 또한 거기에 상응하게 사회개조사업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다음으로, 이 삼대개조사업의 합법칙성에 대한 셋째 측면은 그 주되는 과업이 해결되는 <역사적 순차성>에 대한 문제이다. 이 삼대 개조사업의 주되는 과업이 해결되는 역사적 순차성의 견지에서 보면, <사회주의 제도>의 확립에 의하여 우선 먼저 <사회개조>의 주되는 과업이 해결되고, 다음에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된 데 기초하여 <자연개조> <인간개조>의 과업이 실현되어 나가는 것이 합법칙성으로 된다. 이 삼대개조사업을 균형적으로, 조화롭게 이루어 가지만 그 매개 개조의 주되는 역사적 과업이 해결되는 역사적 순차, 시간적 순차를 보면, 우선 사회주의 제도의 확립에 기초하여 사람들의 <사회정치적 자주성>이 먼저 실현된다.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 제도의 확립에 의해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압박, 계급에 의한 계급의 착취와 압박이 청산되면, 인간의 <사회정치적 자주성>이 높아져 <사회개조>의 주된 역사적 과업이 해결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으로 자연개조와 인간개조를 위한 과업이 전면에 나서게 되고 그러한 과업도 잘 실현해 나가는 것이 합법칙성으로 된다.
 
민중이 <정권> <생산수단>을 장악하기 전에는 인간개조사업을 원만하게, 순조롭게 진행할 수가 없다. 민중의 자주성을 유린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는 착취계급이 <정권>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조건에서는 민중의 <자주의식>은 계속 고양될 수 없다. 그러한 조건에서는 착취계급은 단지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계내에서만 민중의 창조력을 발전시키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한 조건에서는 민중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계속 발전시켜 역사의 주체를 강화시키는 인간개조사업이 성과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 착취계급은 낡은 사회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관계>를 계속 합리적으로 개선해 나가기 위한 활동을 억제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되어야 비로소 민중이 <정권> <생산수단>을 장악하게 되고 자연개조와 사회개조의 과업을 전면에 제기할 수 있게 되며 그러한 과업도 잘 실현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합법칙성이다.
 
이 삼대개조인 자연개조, 사회개조, 인간개조의 합법칙성은 인간활동이 세 영역의 상호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합법칙성이다. 즉 자연개조 활동, 사회개조 활동, 인간개조 활동 사이에 작용하는 합법칙성이다. 이것은 물론 객관적 법칙이다. 왜냐하면 사회에서는, 특히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온 사회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되고, 또 착취사회에서도 주체인 민중은 착취계급과는 대립되어 있지만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자기의 생명 자체의 요구로부터 자연의 주인, 사회의 주인,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되려고 하는 요구를 객관적으로 내세우게 된다. 이러한 자주적 요구는 가장 발전된 물질적 생명체인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필연적으로 내세우는 객관적 요구이다. 이러한 <자주적 요구>에 의해서 삼대개조 운동이 일어난다.
 
또한 이러한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인 집단이 해당한 역사적 시기에 어떠한 생활력, 즉 물질적 생활력과 정신적 생활력을 포함한 어떠한 <사회적 생활력>을 가지는가 하는 것은 개인들의 의사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발전된 물질적 생명체로서의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내세우는 <자주적 요구>에 의해서 인간활동의 방향이 주어지고,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창조적 생활력>에 의해서 인간활동이 추동되기 때문에 사회적 운동이 그 어떤 자의적인, 주관주의적인 것으로 될 수 없다. 그것은 엄연한 <객관적 법칙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주체사관이 내세우는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운동에는 <객관적 법칙>이 없고, 또 거기에는 <객관성> <합법칙성>이라는 방법론적 범주가 탈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의 활동을 보면, 사람은 자기의 <창조적 능력>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만 <자주적 요구>를 실현해 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창조적 능력>에 상응하게 <자주적 요구>를 내세우고 그것을 자신의 <창조적 능력>으로 실현해 나간다. 결국 인간의 <자주적 요구>에 의해서 <인간활동의 방향>이 규정되고, 인간의 <창조적 능력의 수준>에 의해서 <자주적 요구의 실현정도>가 규정되어 나가는 것이 인간활동의 중요한 법칙이다.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인간의 활동이 성과적으로 진행되려면 인간의 <자주적 요구>, <자주적 사상의식>이 높아져야 하며,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이 높아져야 한다. <자주적 요구>, <창조적 능력>, <인간활동 자체>, 이 삼자 사이에 작용하는 합법칙성은 중요한 객관적 법칙성이다.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제기되는 <자주적 요구>, <창조적 능력>은 역시 생명체의 <필연적 요구>로서 객관적으로 제기되는 것이고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일정한 수준의 생활력이 있게 된다. 여기에 그 어떤 <주관주의적인>, <자의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주체인 인간을 곧 <의식>이라고 보거나, <주관>이라고 보거나, <의식의 대변자>로만 보면서 인간활동 자체에나, 인간과 객관세계 사이에는 그 어떤 <객관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법칙성에 대한 피상적이고 일면적인 이해로 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역시 <주체> <주관>을 구별하지 못하고, 또한 인간이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로부터 생겨나는 오해이다.
 
그런데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위에 언급한 <민중의 지위와 역할>을 역사관의 출발점으로 삼는 주체사관의 논리보다 <생산양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유물사관의 논리가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기 때문에 유물사관이 주체사관보다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생산방식>에 기초한 역사관이라야 과학적이지 <만중의 지위와 역할>에 기초한 역사관은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생산방식>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정립하고 그에 기초하여 인류의 역사를 해설한 유물사관이 <관념론족인 역사관>을 극복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누차 강조하였다.. <생산방식>을 기초로 하여 인류역사를 <생산방식의 교체의 역사>로 본 것은 역사관의 발전에서 커다란 공적으로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산방식>을 출발점으로 하는 역사관에는 일면적이고 제한적인 점들이 있다. <생산방식>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은 <생산력> <생산관계>의 통일로서의 <생산방식>에 기초해서 역사를 본다는 뜻이다. <생산방식>이란 곧 <생산력> <생산관계>의 통일이다. 그러나 <생산방식>에는 인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앞의 장에서 이미 자세히 지적하였다. 인간의 <노동력>만 인간에 포함되어 있을 뿐 전 인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생산력>에는 <요구> <이해관계> <주체>로서의 인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생산관계>도 인간들 사이의 관계이지 그 자체가 인간은 아니다.
 
그러므로 <생산방식>에 기초한 역사관은 역사를 <객관적인 면>에서만 파악하고 있다. 결국 이 역사관은 <생산력의 수준> <생산관계>가 적응하는 <필연성>에 기초해서 인류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엥겔스는 역사발전 과정의 일정한 단계에서 정치적 요인, 법률적 요인, 이데올로기적인 요인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있으나, 이러한 경우에도 언제나 역사의 근저에 붉은 실처럼 관통하고 있는 것은 <경제적 필연성>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이처럼 유물사관이란 한마디로 <경제적 필연성>에 관한 과학이다. <경제적 필연성>이란 <생산력의 수준> <생산관계>가 적응하는 필연성이다. 사회생활에서 사장 중요한 것을 <생산력> <생산관계>의 통일인 <생산방식>이라고 보고, 생산력의 수준에 적응하여 생산관계가 변화하면서 사회제도가 교체되어 나간다고 보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생산력이 발전하여 현존하는 생산관계와 모순이 생길 때에 사회혁명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생산관계이든지 그 안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할 여지가 있는 동안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생산력을 <내용>으로 보고 생산관계를 <형식>으로 보았다. 이 생산관계라는 형식 속에서 해당한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동안은 이 형식으로서의 생산관계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견해이다. 이 논리를 좀더 풀어서 설명하면, 내용인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해서 형식인 생산관계와의 사이에 모순이 극도에 달하게 되면, 그때 사회는 <혁명기>를 맞이하게 되고 마침내 새로운 <역사의 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역사과정 속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첨예화 되면 반드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기 위한 혁명이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한편, 생산력이 아직 충분히 발전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관계가 교체될 수 있느냐 하는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현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모순이 첨예화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의 사회화 수준은 높아졌지만 <소유관계> <사적인 소유형태>이기 때문에 <점유> <사자본주의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적인 소유형태 하에서는 생산력이 계속 발전할 수 없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생산력은 <노동력> <노동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산발전의 합법칙성으로부터 생산력의 사회화 수준은 더욱 높아지게 마련이다. 앞장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현재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생산의 사회화 수준은 한 나라의 범위를 벗어나 국제적 범위에서 다국적 기업의 형태로 사회화 되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생산관계는 여전히 사적인 소유형태이기 때문에 그 생산력의 발전에서 얻어지는 생산물은 사유화 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산수단> <사적 소유>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의 사회화 수준은 높지만 점유는 사자본주의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노동자는 더욱 더 <잉여노동>을 착취당하게 되고, <분배>에서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현상이 더욱 더 심각해 지고 있다. 즉 생산력의 사회화 수준이 높아지는 데 따라 분배에서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그로 인하여 노동계급은 더욱 더 착취를 당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생산력을 이루는 <노동력> 자체의 사회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들은 생산에 대한 관심을 점차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차 줄이게 된다. 그 결과 생산력의 발전에 한계가 생기게 된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생산관계, 그 중에서도 <소유관계>가 사적인 것으로 되어 있는 조건에서는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 <노동력>의 결합이 언제나 <소외된 형태>를 띠게 된다. 즉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즉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이용하게 되고, 노동자 자신은 단지 <노동력> <상품>으로 팔아서 <생산수단>과 결합될 뿐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도 노동자 자신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력 자체가 생산에 대하여 응당한 관심을 돌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다.
 
다음으로, 생산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자면 <과학>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생산에 대한 <사적 소유>가 지배하는 조건에서는 매개 자본가가 자기의 기업소의 테두리 내에서 기술발전을 위한 자금을 투자하고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에 생산수단이 사회화 된 사회주의 사회보다 기술발전에서 더 많은 제한성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60년대부터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첨단기술이 계속 발전하여 이 첨단기술의 덕택으로 현재까지 자본주의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로부터 오는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한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결탁과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즉 여러 회사들이 합쳐 다국적 기업을 형성하고 공동자금을 투자하면서, 여기에 국가의 원조, 조절, 통제를 받아서 자본주의 사회는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사적 소유>로부터 오는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과 제한성을 피하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가 확립되어 있는 사회주의 사회의 경험을 일정하게 도입하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적 소유의 한계내에서는 역시 새로운 기술과 과학의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개별적 자본가가 투자하기 힘들다. 이것이 바로 <사적 소유> <생산력 발전>에 제한성을 가하는 한계이다. 즉 이것이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다.
 
다음으로, 오늘날 처럼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는 경우에도, 즉 공업생산이 더욱 더 자동화 되어 나가고, 로버트화 되어 나가고, 전자계산기화 되어 나가는 경우에도, 생산수단이 <사적 소유> 하에 있는 한에서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보다 많은 <실업대군>을 낳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하에서는 그러한 <실업대군>을 완전히 취업시키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실업률이 높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한계내에서는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노동력 인구의 완전취업을 보장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실업문제> 역시 생산력 발전에 제동을 거는 또 하나의 모순으로 된다.
 
최근의 미국, 일본, 독일, 등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제동향을 보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하에서도 전반적으로 사회의 총 생산액은 높아졌지만 저소득 계층과 자본가 계층, 즉 사회의 하류층과 상류층과의 분배에서의 불균형은 더욱 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하에서는 극복될 수 없다.
 
이처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서 한 사회제도에서 다른 사회제도로 넘어간다는 것이 유물사관의 이론이다. 그런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자체도 결국은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 결국은 <생산력>을 이루는 노동자, 생산자가 생산에 얼마 만큰의 관심을 가지게 되는가 못가지게 되는가, 생산자의 자주적 생활이 보장될 수 있는가 없는가, 생산자의 창조적 능력이 계속 증가될 수 있는가 없는가, 바로 여기에 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것도 표현된다. 따라서 주체인 인간의 사회적 조건, 사회생활의 객관적 조건의 위치에만 놓고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분석하게 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 자체의 모순의 내용도 깊이 있게 분석할 수 없다.
 
<생산력>이란 그 자체의 개념으로서는 인간 밖에 객관화 되어 있는 것이다. 생산력 자체가 그 어떤 <의욕>이나 <요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생산관계>가 그 어떤 의욕이나 요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유물사관처럼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인간 밖에 객관화된 요소로 보는데 머물러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현상 자체도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없다.
 
문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어디서 표현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산의 담당자인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보장되는가, 유린되는가 하는 데서 표현된다. 따라서 사람을 중심으로 해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본질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 중심의 시각을 가질 때만이 현대의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첨예화 되었지만 사회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낼 수 있다. 생산관계의 교체, 사회제도의 교체를 가져오는 근본요인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만 있다고 보는 유물사관의 이론을 가지고는 사회변혁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없다. 이북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의 사회주의 혁명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들 나라들에서 생산력의 발전수준은 낮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먼저 일어났고,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생산관계를 개조하는 결정적 요인, 즉 사회제도를 변혁하는 결정적 요인은 <역사의 주체인 근로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수준>, <근로민중의 변혁역량>이다. 실제로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첨예화 되었지만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정치적 역량>, <변혁역량>이 튼튼히 준비되지 못하고, 그 역량이 낡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고수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는 반동세력을 타승할 만한 정도로 준비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이북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확립된 것은 생산력의 발전수준은 낮았지만 낡은 생산관계를 고수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정치 세력을 타승할 수 있을 정도로 변혁세력이 성장했고, 그 변혁역량이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로서 역사를 설명하는 유물사관은 사회제도의 교체과정도 전면적으로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개조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요인은 주체인 근로민중의 <자주적 요구> <창조적 능력>의 발전정도이다.
 
물론 생산력의 발전수준은 낮지만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수준>이 높아서 생산관계가 개조되는 경우에도 새로운 사회제도를 담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산력 수준>은 마련되어야 한다. 즉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여 사회주의 제도를 세운 다음에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 된 민중에게 그들이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물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생산력의 수준은 준비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제도란 민중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 되는 사회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혁명을 한 다음 생산력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민중의 지위를 물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취업시킬 수도 없고 그들을 먹여 살릴 수도 없는 생산력의 수준을 가지고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처럼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해서 생산관계의 모순이 첨예화 되어 혁명이 일어날 경우, 즉 현재의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생산력을 가지고 사회주의 혁명을 할 경우, 생산력의 수준은 사람들의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물질적으로 보장하는 최소한의 수준보다 더 말할 수 없이 높다. 이러한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주체인 민중의 <혁명역량>이 이 준비된다면 사회주의의 생산관계, 즉 사회주의 제도를 얼마든지 확립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기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제도가 먼저 확립되는 것이었다.
 
결국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생산방식>을 출발점으로 삼고 <경제적 필연성>에 기초하여 역사를 설명하는 유물사관적 방법보다도 <민중의 지위와 역할>에 기초해서 역사를 설명하는 주체사관적 방식이 더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생산방식의 교체의 역사>, <경제적 필연성이 관통되어 온 역사>로 보기 보다는 역사를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실현되어 온 역사>, <민중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이 높아져 온 역사>로 보는 것이 역사과정을 더 깊이 있게 해명하는 것으로 된다. 왜 어떤 나라에서는 생산력의 수준이 고도로 높아져서 생산관계와 모순이 생겨 사회변혁이 일어 나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생산력의 수준은 낮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일나는가? <경제적 필연성>에 의하면 언제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질곡으로 전화되었을 때에만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가 오게된다.
 
이것은 <경제적 필연성> 보다도 역사발전의 더 깊은 심층에 존재하는 다른 필연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다른 필연성을 발견한 것이 주체사관이다. 주체사관은 그 필연성이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증대발전하는 필연성>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민중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이 높아지는 필연성>이다. 이러한 주체사관의 관점에서 볼 때 유물사관에서 말하는 <경제적 필연성>이란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증대발전하는 필연성이 <경제생활 영역>에서 표현된 것이다. 결국 <생산력의 수준에 생산관계가 적응하는 필연성>을 주체사관의 용어로 설명하면 <생산력>이란 <자연을 정복하는 인간의 힘>이다. 즉 생산력이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자주성이 실현된 정도를 표현한다. 사람이 자연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배력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바로 <생산력>이다. 따라서 <생산력>이란 <자연에 대한 관계에서 인간의 발전정도>를 표현한다.
 
<생산관계>란 주체사관의 용어로 표현하면, 생산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 <자주성>이 어느 정도로 실현되는가, 아니면 유린되는가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비롯한 근로민중을 착취하는 생산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자본가가 근로민중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수준에 생산관계가 적응한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해석하면 자연에 대한 관계에서 인간의 자주성이 높아지면 그에 맞게 사회관계에서도, 즉 사회생활에서도 인간의 자주성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자연에 대한 관계에서 인간의 자주성, 즉 생산력이 증대발전하면 착취위주의 자본주의 생산관계, 즉 자주성을 유린하는 생산관계는 철폐되고 자주성을 보장하는 생산관계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경우 <경제적 필연성>이란 결국 경제생활에서  표현된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증대발전되는 필연성이다. 그런데 유물사관은 바로 이 <경제적 필연성>을 사회의 모든 필연성을 규정하는 <근본적 필연성>으로, 즉 역사발전의 전 과정에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는 <근본적 필연성>으로 보았다. 한편 주체사관은 이  <경제적 필연성>을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증대발전하는 필연성이 경제생활의 영역에서 표현된 필연성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경제적 필연성>이란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증대발전하는 필연성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역사발전의 근본적 필연성>이란 <생산방식이 발전하는 필연성>, <생산력의 수준에 생산관계가 적응하는 필연성>이 아니라,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증대발전하는 필연성>이라고 주체사관은 결론내리고 있다.
 
마르크스는 주로 영국과 같은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을 연구하고 그에 기초하여 사회역사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과거의 식민지, 반식민지와 같은 나라들에서 전개되고 있는 역사발전의 법칙을 충분히 연구할 수 없었다. 그는 주로 영국과 같은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을 원형, 모델로 해서 사회역사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주로 <생산방식>을 중심으로 사고했다. 그러나 <생산방식>을 역사관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면 앞에서 계속 반복하여 지적한 대로 역사발전의 <근본적 필연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역사과정에 대한 심오한 이해도 할 수 없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생산방식>을 역사관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면 <사회개조운동> <인간개조운동>을 결국 <자연개조운동>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 말하면, 정치, 문화, 사상을 경제에 종속시키고, 정치, 문화, 사상을 경제의 파생물로, 경제의 규정물로 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앞의 장에서 강조했듯이, 이 삼대개조는 각각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띤 영역이기 때문에 정치, 문화, 사상이 전적으로 경제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은 일면적인 이해이다. 이처럼 <경제적 필연성>, <생산방식>에 기초해서 역사과정을 해석하게 되면 경제를 일차적인 것으로 보게 되고 경제로부터 정치, 문화, 사상이 다 파생되고 규정되는 것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사회생활의 이러한 영역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럴 경우 정치제도와 문화제도를 경제제도에 귀착시켜 설명하는 방법에 빠지게 된다. 즉 경제제도가 확립되면 그것의 반영으로서 정치제도와 사상 문화제도가 확립되고 또 그것에 규제되어 그들이 발전된다고 보게 된다. 이러한 이론의 틀 속에서는 사회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를 가질 수 없다.
 
오직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고 <사회발전의 동력>이라는 주체사관의 원리에 기초해서 역사발전 과정을 민중의 <자주적 지위> <창조적 역할>이 높아져 가는 과정으로, 민중의 자주성이 더욱 더 실현되고 창조성이 더욱 더 발양되어 나가는 과정으로 볼 때만이 <자연개조운동>, <사회개조운동>, <인간개조운동>의 상호관계와 <경제제도>, <정치제도>, <사상문화제도>의 상호관계에 대한 가장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유물사관의 제한성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의 붕괴에서 잘 들어났다. 이들 나라들에서는 경제제도만 사회주의 경제제도로 확립되면 사회주의 정치와 사상, 문화는 저절로 잘 발전되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경제적 필연성> <근본적 필연성>으로 보고 <정치적 필연성> <사상문화적 필연성>은 경제적 필연성에서 파생, 규정되는 것으로 본 유물사관의 잘못된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물사관은 사회주의의 정치, 사상, 문화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데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지난 시기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은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확립된 다음에 <사회주의 정권>을 더욱 더 사회화 하여 민중이 정치의 주인으로서 정치생활에 더욱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법, 즉 민중이 정치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고 역할을 높여 나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제국주의자들의 반동적인 정치적 공세에 투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이른바 <민주화><자유화>를 요구하며 사회주의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경제제도>에 의해서 <정치제도> <사상문화제도>가 파생되거나 규정된다고 보는 이해에만 머물러서는 노동계급의 당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사회주의의 정치, 사상, 문화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없다. 그것들이 밀접하게 연관된 사회의 삼대 영역이지만 또한 그들이 각각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 <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 <사상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다같이 함께 경주해야 한다. 따라서 이 <삼대개조사업>을 조화롭게 균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고, 그 가운데서도 <사상문화개조>를 통한 <인간개조>를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만 <사회주의 제도>를 원만하게, 우여곡절과 편향이 없이 잘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관>, <민중의 지위와 역할을 기초에 놓는 역사관>을 확립하여야 사회주의 제도를 발전시켜 나가는 문제도 잘 해결할 수 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의 붕괴사태로부터 이러한 중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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