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3-29 07:51
주체사상의 과학적 인간론
 글쓴이 : 최고관리자
 

주체사상의 과학적 인간론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주체사상은 사람위주의 철학이니까 당연히 <인간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밝힌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철학의 근본원리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이해를 주고 있다. 또한 주체철학은 고찰방식에서도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세계와 사물현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철학이기 때문에 <인간론>이 전반적인 철학체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논문 [포이엘바흐에 관한 테제]의 제 6항에 나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명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인간의 본질은 개별적인 개인에게 고유한 추상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모든 사회관계의 총체이다.”

이 명제는 인간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확립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 명제를 내세우게 된 것은 포이엘바흐의 인간관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포이엘바흐는 인간을 본질상 <자연적 존재>로 보았고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으로 파악했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인간의 <유적 본질(genus, species, kind)>의 내용을 이루는 <이성>, <심정>, <의지>도 사회적으로 제약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자연인>으로서의 <유적 존재>로 파악하는 데 머물렀다. 이러한 포이엘바흐의 <인간관>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결코 인간이 자연적 유대에 의해서 결합된 <자연인>, <생물학적 존재>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다는 데 그 본질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마르크스는 인간이 개인으로서는 결코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없고 단지 <사회관계의 총체>, <사회>라는 체계 안에서만 사회적 존재로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인간을 본질상 <자연적 존재>, <생물학적 존재>로 본 <생물학적 인간관>을 극복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명제 속에서 마르크스는 역시 사회관계가 매개 시대의 구체적인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사람의 본질을 <사회관계의 총체>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을 구체적인 사회관계와 역사적 활동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언제나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였다. 이리하여 마르크스의 이 명제는 인간을 사회로부터 고립된 <추상적 개인>으로 본 인간관, <추상적 인간관>을 극복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점에서 마르크스의 이 명제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 명제에서 어디까지나 포이엘바흐의 생물학적인 추상적 인간관을 극복하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인간이 생물학적 유대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의하여 결합된 존재이고, 따라서 일정한 <구체적 역사성>을 띠는 사회적 체계 속에서 사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머물렀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사람과 사회관계의 연관에서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고 조건 지어 진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이 명제 속에서 사람은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존재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생물학적 유대에 의해서 결합된 생물학적 존재, 자연적 존재라는 데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에 의해서 결합된 <사회적 존재>라는 데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는 데서는 큰 의의가 있지만, 인간과 사회관계의 연관을 해석하는 데서는 일면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인간과 사회관계의 연관

 

사람과 사회관계의 연관에는 두 면이 있다.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면, 사회관계에 의존되는 면이 바로 그 한 면이다. 또한 사람은 자기를 제약하는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해 나가는 다른 면이 있다. 그러면 여기서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면>과 사람이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면>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면이냐 하는 점이다. 사람과 사회의 존재와 발전의 견지에서 볼 때, 만약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고 의존되기만 한다면 사회관계를 개조하고 지배하여 역사를 발전시켜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회의 발전에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면은 사람이 자기를 제약하는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해 나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된다는 면을 무시하는 것은 관념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면을 밝히는 것만이 사람에 대한 과학적 이해이고, 사람이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면을 밝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과학적 이해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된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위에서 지적한 사람과 사회관계의 연관의 두 면 가운데서 사람이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면이 더 본질적이고 주도적인 면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사람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더욱 심화 발전시키는 열쇠로 된다. 그럴 때만이 사람과 사회의 발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사람은 자기를 제약하는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해야만 자신과 사회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고 역사를 전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체사상은 바로 사람이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한다는 면을 사람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중요한 징표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런 데로부터 주체사상은 사람이 자연과 사회관계를 지배하는 속성을 <자주성>이라 부르고, 사람이 그것들을 개조하는 속성을 <창조성>이라 부르고, 사람이 그것들을 지배하고 개조하는 활동을 자체로 규정하는 속성을 <의식성>이라 부른다. 이러한 사람의 속성에 기초하여 주체사상은 사람이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이리하여 주체사상은 사람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런데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 제약된다는 점을 무시하고 사람자체의 주동적, 능동적 역할을 물질적인 사회관계와 동떨어져서 추상적으로 강조하는 일부 관념론자들의 경향을 주체사상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다. 일부 관념론자들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사람의 주동적, 능동적 작용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주관적인 자의, 사람의 의식자체의 역할이 자연과 사회관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관념론이다. 이러한 사람에 대한 관념론적인 논리와 주체사상을 동일시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체사상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된다는 유물론적 이해를 전제로 하고 그 과학성을 시인한 기초위에서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제약하는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존재라는 징표를 사람의 본질에 대한 규정에 포함시킴으로써 사람에 대한 발전된 과학적 견해를 확립했다. 따라서 사람이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존재라고 보는 주체사상의 견해는 관념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의 속성의 발생과 역할

 

일부 학자들은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람자체가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속성, 즉 본원적, 선천적, 생득적 속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주체사상이 밝힌 사람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해석하는 데서 <발생, 형성의 면><기능, 역할의 면>의 관계를 잘못 인식한 데로부터 나온 결과이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이루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자연적 속성>,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속성>이다. 사회적 속성은 인간이 사회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형성, 발생의 견지>에서 보면 그것들은 인간이 사회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 속에서 갖게 되는 속성이다. 이것들은 결코 생물학적인 유전의 방법으로 획득되는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생활 과정에서 얻어지는 <사회적 속성>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사회생활 과정에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속성에 규제되어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활동, 즉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기능과 역할의 면에서 보면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고 조절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아 인간의 속성, 성질에 관해서도 단지 <발생, 형성의 견지, 시원의 견지>에서만 사고하고 있다. 지난 시기 철학의 근본문제가 <세계의 시원문제>였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사고하는 데서 모든 현상, 모든 성질이 어디에 시원을 두고 생겨나는가, 어디에 근원을 두고 발생하는가 하는 견지에서만 주로 사고했다. 물론 인간의 속성, 성질은 사회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사회생활에 근원을 두고 형성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회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지배되는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사회관계를 지배하며 개조하는 존재이다.

그러면 왜 인간은 그러한 존재로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이 사회관계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속성으로서의 <자주성>을 가지고 있고, 사회관계와 자연을 개조할 수 있는 속성으로서의 <창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는 것이 일단 형성된 다음에는 사회관계와 자연을 지배하고 개조하는 활동, 즉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해석할 때는 그 <발생, 형성의 면><기능, 역할의 면>을 통일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들이 사회관계에 기초해서 발생되었다는 데로부터 인간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존재라는 면만을 보고,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기능과 역할을 보지 않는다면 인간이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고찰할 때도 <발생, 형성의 견지><기능, 역할의 견지>를 통일적으로 보고 사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 인간관과 집단적 인간관

 

일부 학자들은 주체사상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강조하는 것은 <개인주의적 인간관>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주체사상에서 <인간>을 말할 때 우선 <집단으로서의 인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도 역시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특성, 즉 사람들의 사회적 집단의 특성이다. 인간의 사회적 집단은 동물의 무리와는 달리 3가지 근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첫째로, 동물의 무리는 외부의 환경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집단은 외부환경에 종속되어 살아가게 되면 그것은 동물의 무리로 전환되고 만다. 인간집단의 근본적인 특성은 외부환경을 지배하는 데 있다. 그래서 자연을 자기에게 점차 복종시켜 나가는 것이 인간집단의 특성이다. 인간이 외부환경을 지배하지 못하고 외부환경에 종속되어 있다면 인간은 사회적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고 동물의 무리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외부세계를 지배하는 자주적 특성인 <자주성>은 인간집단의 근본적 특성으로 된다.

둘째로, 동물은 외부환경을 개조, 개변시키지 못하고 자연이 제공하는 기성의 재료를 그대로 섭취하면서 생존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외부환경을 개조, 개변시켜야 한다. 인간집단이 외부환경을 개조, 개변하지 못하면 다양한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집단은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외부환경을 개조, 개변하는 창조적 특성, <창조성>은 인간집단의 두 번째 특성으로 된다.

셋째로, 동물의 무리는 생물학적으로 생존하려는 본능에 맞게끔 자기의 행동을 하지만, 인간의 사회적 집단은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에 맞게끔 자기의 활동을 규정해 나간다. 인간집단을 이루는 개인들이 자기의 생물학적 본능에 맞게 자기의 활동을 규정해 나간다면 인간의 사회적 집단은 형성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요구와 이해관계에 맞게 자기의 활동을 규정하는 의식적 특성, <의식성>은 인간집단의 세 번째 특성으로 된다.

인간의 사회적 집단이 바로 이러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집단의 성원으로 되어야만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게 되고 그것들을 자신 속에 체현하게 된다. 따라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형성발전에서 개인보다 집단이 더 우위에 놓이게 된다. 물론 집단은 개인들로 이루어지는 것만큼 매개 개인들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높아져야 집단 전체의 생활력이 커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집단은 매 개인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높이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개인들은 자기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발전시켜 사회적 집단을 강화시켜야만 사회적 존재로서 살며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은 사회적 집단의 위력과 통일 단결에 이바지하는 조건에서만 자기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과 관련하여 고찰할 수 있는 집단과 개인의 관계이다. 이러한 집단과 개인의 본래의 관계는 사회주의사회에서 전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이북 사회주의사회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애호되고 있는데, 이 구호는 바로 인간집단의 근본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 집단은 개인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발전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과 교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주의식을 고취하고, 창조적 능력을 키워주고, 올바른 사상의식을 갖도록 노력한다. 또한 개인은 집단의 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자주적이고 창조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활동하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개인주의적 인간관이 아니라, 집단주의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체사상의 집단주의적 인간관에서는 결코 개인이 무시되지 않는다. 왜냐면 집단과 개인의 관계는 서로 뗄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고, 집단은 개인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형성발전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개인은 자기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집단의 통일과 단결에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은 결코 단순히 집단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개인의 독자성, 자주성이 최대로 보장되고, 개인의 창발성, 창조성이 최대로 발양되어야 집단의 위력도 강화되고, 집단의 생활력도 증대되며, 그로인해 집단자체도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집단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결코 대립관계나 모순관계에 있지 않고 완전한 통일관계에 있다. 이것이 원래 인간사회의 고유한 원리이다. 이러한 고유한 원리를 구현하는 사회가 바로 사회주의사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한 원리가 왜곡된 사회가 바로 착취사회이다.

일부 학자들은 사회주의사회의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순전히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추상적 속성과 과학적 속성

 

일부 학자들은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추상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관념론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오해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는 데서 <일반적인 것><개별적인 것>, <구체적인 것><추상적인 것>과의 관계를 잘 못 인식하는 데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주체사상에서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본질적 특성으로 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일반적 개념을 쓰고 있고, 이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과학적으로 추상해서 규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는 과학적 추상은 언제나 구체적인 내용과 결합되어 있다. 구체적인 내용에 기초해서 과학적으로 추상한 속성이 바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다.

이 인간의 본질적 속성들은 매개 사회제도마다 역사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자기의 고유한 구체적, 역사적 내용을 갖고 있다. 노예, 농노, 노동자를 비롯한 근로민중의 자주성의 내용이 다 각각 고유한 구체적, 역사적 내용을 갖고 있다. 노예의 경우에, 자주성의 내용을 이루는 주되는 것은 노예적인 착취와 인신적인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농노의 경우에는 봉건적인 압박과 신분적인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노동자를 비롯한 근로민중의 경우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온갖 착취와 압박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매개 사회제도마다 민중을 이루는 계급과 계층들의 자주성의 내용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노예나, 농노나, 근로민중이 가지는 자주성의 구체적 내용 가운데서 일관하고 있는 공통적인 것, 일반적인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예속과 구속을 반대하고 자유롭게 살며 사회의 주인으로 살아가려는 속성이다. 그래서 그것을 일반화하여 <자주성>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주성>이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게 살아가려는 인간의 성질이다. 이 성질은 노예, 농노, 노동자를 비롯한 근로민중, 그리고 사회주의사회의 근로민중에게 있는 자주성의 구체적인 내용가운데서 공통한 일반적인 것을 과학적으로 추상한 개념이다. 이 자주성의 개념은 과학적으로 추상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구체적, 역사적 내용과 결합되어 있고, 구체적, 역사적 내용 속에서 일반화 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주성을 <추상적 속성>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일부 학자들은 주체사상이 말하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마치 포이엘바흐의 <유적 본질>을 이루는 이성”, “심정”, “의지와 같은 것이 아닌 가, 그리고 구체적인 사회관계와 역사적 행동 밖에서 고찰한 그 무엇이 아닌 가하고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규정을 내릴 때,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다시 말하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로부터 고립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속성이다. 따라서 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구체적인 사회관계와 역사적 행동 밖에 존재하는 속성이 아니다. 주체사상이 말하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포이엘바흐의 <유적 본질>과 같은 개념으로 될 수 없다.

 

인간론의 계급적 성격

 

일부 학자들은 주체사상의 인간론은 <계급성>을 상실한 <비계급적 인간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주체사상의 인간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이다. 어떤 철학이나 다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사용하는 철학의 경우에도 그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 가하는 것은 여러 철학에 따라 다 각기 다르다. 그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은 각 철학의 바로 <계급적 입장과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존주의는 <인간>불안과 죽음에로 가는 존재로 본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이란 바로 불안, 공포, 절망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면 실존주의가 인간을 이렇게 규정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실존주의가 바로 파국과 멸망에 직면한 현대 자본가계급을 비롯한 지배층을 일반화해서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토마스주의나 신토마스주의와 같은 종교철학에서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종교적 동물>, 혹은 <신앙심을 가진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종교 신자를 일반화해서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쓰는 경우에도 그 <인간>을 일반화 하는 소재를 어디에서 찾는 가에 따라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규정자체도 달라진다.

주체사상의 경우에는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근본특성>을 일반화 하여 <인간>에 대한 규정이 내려지고 있다. 앞에서 다룬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바로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에게 고유한 특성이다. 자연과 사회를 지배해 나가는 투쟁을 계속 벌려 나가는 역사의 주체가 바로 근로민중이다. 근로민중은 또한 언제나 낡은 것을 반대하고 새것을 지향하며 새것을 창조하는 투쟁을 줄기차게 벌려 나가고 있다. 근로민중은 또한 자기의 생물학적인, 육체적인 욕망보다도 사회적인 요구를 더 중시하고,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집단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면서 거기에 맞게 자기의 행동을 규정한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은 근로민중이 어떻게 되든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개인본위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고 육체적 욕망을 마음대로 충족시키려는 욕구에 따라서 자기의 행동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이 내세우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을 일반화하여 창조한 개념이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자주성을 유린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는 계급이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은 민중의 자주성을 적대한다. 또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이 창조성을 전면적으로 발휘하느냐, 발휘하지 못하느냐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율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한에서만 노동자들의 창조성의 발휘에 이해관계를 갖는다. 자본가계급의 목적은 고율이윤의 획득이지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발전, 창조적 발전이 아니다. 의식성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자본가계급은 결코 사회전체를 위한 요구에 맞게 자기의 활동을 규제하는 계급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계급만의 이익과 치부를 위해서 자기의 행동을 거기에 맞게 규정하는 계급이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은 철두철미 개인주의적이지만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은 집단주의적이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이 인간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다라고 규정한 것은 <참다운 인간>, <참다운 사회적 인간>의 특징을 염두에 둔 정식화이다.

물론 사회적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마땅히 그러한 존재로 되어야 한다. 원래 사회적 인간은 그 본연의 자세로 볼 때 마땅히 사회 속에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인간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한 견지에서 보면, 착취계급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간의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사실상,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개인이 집단의 성원으로 됨으로써만, 또한 구체적인 사회적 제도 속에서 역사의 진보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 즉 근로민중의 성원으로 됨으로써만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집단이 개인들에게 교육과 교양을 하는 통로가 기본통로이지만 매 개인들은 다 자기의 생활처지, 생활경로, 교제관계, 등등이 다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매 개인들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수준은 차이가 있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이 아직 지배층의 지배논리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고, 아직 거기에서 탈피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이 <자주의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노예사회에서 노예들이 노예노동에 묵묵히 순종하는 한에서는 노예의 처지를 개변하기 위한 <자주의식>을 가질 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노예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예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노예들도 점차 실제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자주의식을 키워나갔다. 사실상, 착취사회는 노예들에게 자주의식을 키워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럴 경우 착취사회는 멸망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예사회에서는 <노예의식>, <굴종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기본교육이고 교양이다. 그러므로 노예들이 거기로부터 탈피하여 건전한 변혁사상을 가지게 되기까지는 일정한 역사적 기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진적 변혁조직, 선진적 당이 대중들에 대한 교육과 교양을 어떻게 하는 가 하는 문제가 개인들의 <자주의식>을 키워주는 문제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원래 인간은 가장 발전된 존재로서 마땅히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져야 하는 존재인데 사회제도의 특성에 따라 자주의식이 마비되고 말살되는 경우가 생긴다. 착취사회제도의 사회적 조건자체가 인간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그것을 말살시키도록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는 그 자체가 사람들의 자주성을 보장하고 발양시키는 제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람들이 자주의식을 가지는 것은 착취사회에서 보다 훨씬 더 유리하다.

그러나 매 개인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는 데서 결코 사회적 제도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 개인의 노력, 의식적인 투쟁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래서 동일한 사회제도 하에서도 자주의식을 가지는 속도가 더 빠른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으며, 자주의식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의식적인 투쟁의 결과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도 획득된다. 따라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형성에 있어서 개인들의 주동적 역할이 매주 중요하다.

 

인간론에 대한 결정론과 비결정론

 

일부 학자들은 주체사상이 인간의 활동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기초하여 설명하는 것은 <비결정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주체사상이 과연 유물론적 <결정론>이냐 아니면 <비결정론>이냐 하는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이며,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바로 <사회정치적 생명>을 표현하고 있다는 주체사상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그러한 오해가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주체사상이 철학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을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이해한 점이다. 과거의 철학사를 돌이켜 보면, 유물론은 일반적으로 모든 물질에 존재하는, 즉 저급한 물질에서부터 고급한 물질 모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속성, 성질에 주되는 주의를 돌렸다.

이에 반하여 관념론은 고급한 존재에 있는 속성, 성질, 예를 들면, <의식>, <생명>과 같은 것에 주되는 관심을 돌리면서 그것을 신비화 하고 절대화 하였다. 그리하여 관념론자들, 특히 생의 철학자들은 <생명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돌렸다. <생의 철학>이란 곧 <생명의 철학>이라는 뜻과 같다. 생의 철학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는 쇼펜하우어는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의 <근원적 방향>은 생명 그 자체의 방향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 <육체적 생명>에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찾았다.

생의 철학자 니체는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생물학적 생명, 생물학적으로 생존하려는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로 표현하면서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서 <생명의 방향>이 새롭게 설정된다고 믿었다. 니체는 바로 이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되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 사상은 주저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집중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다음으로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쇼펜하우어의 <생존의 의지>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더욱 개악시켜 모든 생명물질의 근저에는 <생의 충동>(엘랑비탈)이라는 것이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생의 충동>에 의해서 이른바 <창조적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생명>을 비물질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와 같이 생의 철학자들은 생명을 단지 <생물학적 생명>, <육체적 생명>으로만 이해하고 이 생물학적 생명, 육체적 생명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함으로써 생명을 왜곡했던 것이다. 이것이 관념론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처음으로 생물학적 생명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생의 철학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마르크스는 <생명>을 신비한 것으로 보지 않고 <물질의 존재방식>으로 보았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이나 [자연변증법]과 같은 저서들에서 생명이란 단백질의 존재방식이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여기서 <단백질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생명은 단백질을 이루는 화학물질들의 부단한 자기갱신이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란 신비한 것이 아니라 단백질이란 특수한 <물질의 존재방식>이라는 점을 엥겔스는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생명의 물질의 존재방식, 생명의 물질적 근원자체를 지적했을 뿐,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규정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사회정치적 생명>에 대한 문제를 제기조차 하지 못했다.

주체철학은 처음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사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사는 존재이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살며 발전하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은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자기의 요구를 자신의 사회적인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간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를 사회적인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간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가 <자주성>으로 표현된다. 또한 그러한 요구를 실현하려는 사회적인 생활능력이 <창조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생명활동을 자체로 규정하는 특성은 <의식성>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표현된다.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져야만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만이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살며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주체철학은 사람이 <자주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노예적 굴종의식>을 가지게 되면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사회적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간다. 사람이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가는 그 자체는 외부환경의 요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외부환경의 제약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생명으로서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사회적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 자체는 인간 자체의 <생명의 요구>로 된다. 즉 그것은 인간 자체가 살며 발전하기 위해서 객관적으로 나서는 요구로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을 객관세계를 반영한 주관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생명체의 <생명의 요구>이고 이 요구를 실현하는 <사회적 생활력>이다. 그러므로 자주성과 창조성은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인자>로 된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활동의 궁극적 원인은 사회의 <경제관계>에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이다. 엥겔스는 [루드비히 포이엘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의 활동은 언제나 뇌수, 즉 의식을 경유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충동에 불과하다. 이 충동의 충동, 그 충동을 일으키는 배후에 있는 근원적 충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의 경제관계이다.”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사람이 <사회관계>, 그 중에서도 <경제관계>에 의해서 제약을 받기 때문에 경제관계로부터 인간의 활동의 요구와 목적이 나온다고 보았다. 물론 사람이 사회의 경제관계에 의해서 제약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자기의 활동에서 사회의 경제관계에 의해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마땅히 자기의 활동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관념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장 발전된 존재, <사회정치적 생명체>로서 자기를 제약하는 경제적 관계자체도 지배하고 개조하기 위한 활동을 벌려나간다. 따라서 경제관계를 포함한 모든 사회관계와 자연을 지배하면서 살며 발전하려는 인간의 요구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가장 발전된 존재에서 객관적으로 나서는 요구이다. 따라서 이 요구자체는 결코 경제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인자>가 아니라, 사회적 생명체에서 객관적으로 나서는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인자>이다.

인간 자신의 창조적 생활력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인자>는 인간 밖에만 있고 인간자체에는 없다고 보는 것은 일면적 이해이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은 인간 활동의 <물질적 기초>를 밝혀주었다는 점에서는 큰 공헌을 하였고, 또 그것은 진리이다. 관념론자들은 사회의 경제관계, 물질적 기초와 동떨어진 <주관적 자의>, <주관적 정신>에 의해서 인간 활동을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관념론적 결정론>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사람의 활동에서 사회적 물질적 기초인 경제관계에 의한 제약을 시인하고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가장 발전된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보고 있다. 이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자체는 생명자체의 객관적 요구로 되기 때문에 이러한 <자주적 요구><창조적 능력>이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인자>로 된다는 것을 주체사상은 과학적으로 밝혔다. 그러므로 자주성, 창조성에 기초해서 인간의 활동을 설명하는 것이 결코 <비결정론>이거나 <관념론적 결정론>으로 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적 존재>인 동시에 객관적인 <물질적 존재>이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도 어디까지나 <물질적 생명체>이다. 물질적 생명체로서 살며 발전하려는 인간의 요구는 생명자체의 객관적 요구로 나선다. 그러므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인간 활동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된다. 따라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기초한 인간 활동에 대한 설명방법이 결코 유물론을 떠난 <비결정론>으로 될 수 없다.

이러한 주체사상의 결정론을 정확히 이해해야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활동을 설명하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와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주체사상의 고찰방법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시기 변증법에서는 보통 사물들의 <연관>으로부터 그들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이 상호작용을 통하여 <운동>을 파악하고, 이 운동을 통해서 <운동의 담당자>를 알아내는 고찰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지난 시기는 모든 사물들이 상호 고립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형이상학의 주장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변증법적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연관>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것이고, 상호작용이야말로 <운동>이며, 바로 이 운동이 모든 사물의 <질적 표현>이니까 운동을 통해서 이 운동의 담당자인 <사물>을 알 수 있다고 과거의 변증법은 이해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우선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고, 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의 고유한 <속성>에 따라서 <운동>을 하고, 이 운동을 통해서 인간과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활동을 벌려나간다고 인간의 활동을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주체사상의 인간론으로부터 나오는 <인간의 활동>에 대한 고찰방식이다.

사실상, <사물>이 있고서야 그 <운동>이 있고, 이 운동이 있고서야 다른 사물과의 <상호작용>이 있으며, 이 상호작용을 통하여 <상호관계>가 맺어진다고 보는 주체사상의 고찰방식이 더 철저한 유물론적 고찰방식으로 된다. 주체사상의 인간론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과 그 진수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게 되면 주체사상의 다른 내용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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