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5-17 03:03
김일성주석님의 감옥생활(세기와 더불어에서)
 글쓴이 : 최고관리자
 
김일성주석님의 감옥생활(세기와 더불어에서)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김일성주석님께서 길림에서 활동하실 때 청년학생들을 조직하여 독서회도 하고 일제를 반대하는 청년들로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였고 그 중에서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핵심분자들로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차차 알려지자 일제와 국민당의 반동군벌은 이들 청년들을 체포구금하기 시작하였다. 김성주학생도 독서회사건으로 중국 반동군벌당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김성주학생은 국민당정부와 반동군벌의 반쏘책동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공청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을 투쟁에 궐기시키고 사회주의나라인 쏘련을 옹호하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는 지구상에 처음으로 수립된 쏘련의 사회주의제도를 희망의 등대로 바라보면서 그것을 옹호하기 위하여 싸우는것을 공산주의자들 앞에 부과된 성스러운 국제주의적 의무로 간주하였다. 당시 국민당군벌은 쏘련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힌 김성주학생은 이러한 친쏘운동을 비롯한 여러 반제투쟁에 가담한 것을 감추고 오로지 독서회사건의 주모자로만 취급되도록 노력하였다. 군벌당국은 최동오선생을 데려다가 성주학생의 신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그가 쏘련과 연계가 있는지, 어떤 운동을 했는지 알아보았으나 독서회사건이외에는 알아내지 못했다

김성주학생은 혁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감옥은 하나의 투쟁무대라고 생각했다. 감옥을 단순히 죄인들을 가두어두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수동에 빠져 아무것도 할수 없으니 감옥을 세계의 한 부분이라고 여기고 그 비좁은 공간 속에서도 혁명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해야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외부와의 연계를 취하여 파괴된 조직들을 수습하기도 하고 석방투쟁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손정도목사는 이불을 보내주기도 하고 여러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성주학생은 감옥에 있으면서 한 간수에게 자신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밝히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를 교양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착취와 압박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세우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이다, 돈 많고 권세있는 놈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비적>이라고 하면서 욕하는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지주, 자본가나 토호, 매국노들이 판을 치는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 엎으려고 하기때문이다.”


그 간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자신들이 무식하다보니 지금까지 당국의 거짓선전에 넘어갔는데 이제부터는 그런 말을 곧이 듣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후부터 그 간수는 성주학생이 다른 감방에 무슨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하면 선선히 들어주었다. 얼마후부터는 그를 통하여 외부와의 연계까지 취할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감옥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와졌다고 한다.


김성주학생은 감옥에서 조용히 사색도 하면서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이 남긴 경험과 교훈을 분석해보았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시위투쟁도 해보고 파업투쟁도 해보고 의병투쟁도 해보았으며 독립군운동도 해보았으나 실패하였다. 그 원인을 그는 반일투쟁대열 안에 여러 파벌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의병투쟁도 의병들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이념상의 대립과 모순으로 의병들의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독립군도 조직자체에서부터 분산성과 산만성을 드러냈다.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을 등에 업고 조선의 독립을 이룩해보려고 시도하였고, 일부는 쏘련의 힘을 빌어 일본을 타승해보려고 하였으며, 일부는 미국이 조선독립을 <선사>해줄것으로 믿기도 했다.

이처럼 민족주의자들이 사대주의를 하게 된것은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은데 있었다고 성주학생은 분석하였다.. 민족주의운동은 인민대중을 떠나 상층운동에 머물러있었기때문에 튼튼한 지반을 가질수 없었으며 인민들의 지지도 받을수 없었다고 그는 보았다.


인민들과 이탈되여 상층의 몇몇 사람들끼리만 모여앉아 말공부와 권력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대중을 혁명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않은 본질적 약점은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속에서도 발견되었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결속하며 투쟁에 동원할 대신 인민들과 동떨어져 말공부나 하고 <영도권쟁탈>을 위한 권력싸움만 하였다고 그는 비판하였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자체로 당을 꾸리고 혁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파가 <정통파>라고 하면서 감자도장까지 만들어가지고 국제당의 승인을 받으러 돌아다니였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김성주학생은 감옥에서 이러한 우리 나라의 민족주의운동과 초기공산주의운동의 실태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혁명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심각히 느끼고 새로운 결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여기서 그는 조선혁명의 주체(조선인민 자신))와 조선혁명의 추동력(조선인민의 힘), 그리고 혁명방법(실정에 맞게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표현하였다.이것이 바로 그가 7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1930년 5월초에 길림감옥에서 나와 1개월 후인 1930년 6월말 카륜회의에서 발표한 [조선혁명의 진로]에서 발표한 내용의 핵심으로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 때를 주체사상의 창시로보고 있다.

이와같이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석님의 감옥투쟁을 비롯한 피나는 혁명실천투쟁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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