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08 07:24
김일성주석님의 <이민위천>의 한생
 글쓴이 : 최고관리자
 

김일성주석님의 <이민위천>의 한생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나는 1989 7월 처음으로 김일성주석님을 접견한 이래 그를 나의 마음의 기둥, 신념의 기둥으로 생각하며 살아 왔다. 주석님께서 항일혁명의 투쟁 속에서 창시한 주체사상은 바로 나의 생의 나침반이 되었고 모든 종교와 사상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 나는 지금 다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를 읽으며 주석님의 위대한 생애를 돌이켜보고 있다.


김일성주석님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은 바로 우리 인류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해준 지도사상으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어떤 구속과 예속에서 벗어나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써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인 <자주성>실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의 목적이며 보람이고민의 자주성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역사라고 주석님은 밝혀주시었다. 나는 주석님을 접견한 후부터 그가 저술한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고 그의 사상을 심화발전시켜 [김일성주의]체계화 시키신 김정일위원장님의 논문들도 모두 읽었다. 그리고 주체사상을 전공한 이름있는 조선의 학자들과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론하였다.


나는 주석님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넘쳐나는 그의민에 대한 사랑, 믿음, 헌신성, 소탈함을 느껴왔으며 그가 곁에서 나를 지도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는민을 하늘처럼 여기시고 속에 계시며민의 행복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셨기에 가장 곁에서 그를 보좌했던 김정일위원장님은 주석님의 유훈을 어떻게 해서라도 실천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작업복을 입으시고 주석님의 동지로서, 제자로서, 일꾼으로서민의 행복을 위하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헌신의 삶을 살다가 작업복차림으로 열차에서 서거하셨다.


분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고 분의 사상, 성품, 일본새가 모두 하나였다. 분을 잃은 조국의 인민들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신학과 철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새롭게 생각해 보곤 한다.

 

 

3년간 공생애(공인으로서의 생활, 공적인 생활) 나선 예수를 따라 다니며 일생을 의탁했던 자신들의 스승이 어이없게 십자가에 박혀 죽자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다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3년간 함께 지낸 스승과의 생활경험이 살아 있었다. 스승의 말씀, 비유, 결단, 행동, 십자가 사건, , 마음속에 새겨진 스승 예수가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고 그들 속에 되살아나는 스승의 가르침들을 전파할 필요성을 느꼈다. 제자들 속에 예수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탄생이었다. 부활사건은 바로 예수의 제자 자신들의 새로운 인간에로의 부활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 각자 자신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부활보다 부활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의 기둥, 신념의 기둥을 잃은 조국민들에게 만약에 주석님과 그대로 닮으신 후계자가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상실의 슬픔을 극복할 있었겠는가? , 대중, 군대의 일심단결체인 <사회정치적 생명체>중심, 뇌수로서의 수령의 계승이 있어 일찍부터 조국의 인민들 마음 속에 김정일위원장님과 김정은국무위원장님이 신념의 기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조국의 인민들은 다시 힘과 용기를 내어 그들의 주체사회주의 혁명, 조국통일, 세계의 자주화위업을 계속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후계자에 의해 선대 수령이 부활하였고민의 마음 속에 선대 수령들이 부활할 있었다고 생각된다.


김일성주석님의 사상과 인민적 품성, 그의 헌신성, 등의 위대성에 대하여 직접 나의 접견경험과 최근에 다시 읽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통하여 조금이나마 여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주석님의 위대성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김일성주석님을 처음 만나뵈온 것은 1989 평양에서 진행된 13 세계청년학생축전 때였다. 재미동포들도 70여명이 참석하였고 그때 나는 재미동포 대표들 분들과 함께 주석궁으로 가서 존경하는 김일성주석님을 직접 뵙는 기회를 가졌다. 주석님께서는 우리 대표들을 보시자 반갑습니다, 우리 연설은 생략하고 식사나 같이합시다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식탁으로 안내하시었다. 나는 그때 대표들 중에서 나이도 제일 어렸고 콧수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말석자리에 앉다보니 주석님과 바로 마주보며 앉게 되었다. 주석님께서는 긴장한 우리들을 의식하시고 여기 까만 감자떡이 있는데 한번 맛을 보라고 하시며 감자는 얼어도 먹고 썩어도 먹습니다, 감자는 버릴게 없습니다, 나는 감자박사입니다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손수 감자떡을 우리에게 권하시었다. 그러시면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인민들이 산에서 감자를 캐는 하면서 유격대를 위하여 남겨놓은 것을 알면서도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감자를 캐러 내려가지 못해 감자가 썩는 경우가 있었으나 나중에 적들이 후퇴한 썩은 감자를 캐서 떡도 해먹고 국수도 해먹던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시었다. 주석님은 국가원수라기보다는 가까운 이웃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날 주석님께서는 우리 재미동포 대표들에게 많은 동포대중을 묶어 애국사업에 기여하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단결해야 힘이 있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19914월 태양절과 1992 주석님 생신80돌이 되는 4 명절때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 대표들과 함께 주석님을 다시 만나 식사를 같이하는 기회를 가졌다. “여러분들은 미국에 사는 동포들이니까 미국실정에 맞게 애국운동을 해야 한다강조하시던 주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주석님을 뵈올 때마다 계속 강조하신 것은 재미동포들의 통일단결이었다.


주석님을 마지막으로 뵙고 난지 2 뜻하지 않게 존경하는 주석님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평양을 향하여 달려갔다. 주석궁에 계신 주석님의 영구 앞에 나는 엎디어 엉엉 울었다. “2주후면 김영삼대통령과 만나시어 조국의 통일을 의논하시기로 해놓고 이렇게 아쉽게 떠나가시면 조국통일은 어찌되는 것입니까하고 나는 속으로 외쳐대며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존경하는 김일성주석님을 생각하며 자주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전집 그리고 전기를 읽으며 역사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주석님께서민의 지도자로서 그렇게 존경을 받으시게 것은 우선 그이의 가족의 전통적인 애국심 특히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과 어머님 강반석여사님의 애국심의 영향이 컸으며 아버님께서 남겨놓으신 혁명조직인 조선국민회(19173 23 결성) 회원들의 도움의 영향이 컸다. 김형직선생님의 <지원의 사상>개인의 출세를 위한 원대한 뜻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 인생관>가지고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기어이 나라의 해방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뜻한다.


언제인가 김형직선생님은 아드님이신 주석님과 주석님의 할아버님, 할머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지원의 사상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라를 독립시키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몸이 찢기여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 놈들과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김형직선생님의 사상을 김일성주석님 자신이 그대로 이어받아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하셨고 다음으로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대를 이어 민족의 자주위업을 수행해나가셨고 지금은 김정은국무위원장님께서 대를 이어 주체혁명위업을 계승하고 계신다. 이러한 조선의 최고지도자의 계승은 결코 왕조의 계승이 아니라 조국의 자주적 해방을 위한 <혁명전통의 계승>이다.


또한 김형직선생님으로부터 주석님께서 가장 깊게 받으신 교훈은 <혁명동지>대한 사상이다. 주석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님께서 조선독립을 위한 길에서 동지 한명을 얻기 위하여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시었다.


주석님께서는 나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아버지를 통하여 동지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배웠다.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쓰시었다.


또한 주석님께서는 회고록에서 나라와민을 위한 진심만 있으면 좋은 동지는 얼마든지 얻을 있다, 문제는 뜻이고 마음이다, 돈은 없어도 뜻만 통하면 서로 동지가 있다, 동지를 위해 죽을 있는 사람만이 좋은 동지를 얻을 있다 하신 아버님의 동지애의 사상에 대한 말씀을 회고하시면서 그때 아버님께서 해준 말씀은 지금도 자신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말씀하시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아버님께서 한평생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어떤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나라의 해방과 근로민중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서슴없이 바치셨다고 회고하시었다. 그리고 아버님은 물욕과 사리사욕도 없었으며 자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민족을 생각하고 자신의 가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조국을 먼저 생각하며 찬바람을 맞받아 일생을 쉬임없이 걸어가심으로써 인간으로서도 청렴하게 살았고 혁명가로서도 결백하게 살았다고 회고하시었다. 그래서 주석님께서는 어떻게 하나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한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언급하시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주석님께서는 아버님의 혁명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고 아버님이 조직하신 <조선국민회> 조직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시었다. 한창 혁명활동을 하시던 과정에서 철주동생과 형권삼촌을 잃으시었고 그리고 어머님도 병으로 잃으셨다. 그리고 그이를 지도자로 아끼며 따르던 김혁, 차광수, 최창걸, 리광, 혁명동지들을 수없이 잃으셨다. 이러한 피바다위에서 주석님의 오늘의 위대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이의 위대성은 결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라 그이의 희생적 민족해방운동과 항일투쟁이라는 혁명적 투쟁 한가운데서 이룩된 것이다. 주석님의 항일혁명활동에 대한 기록을 읽노라면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우리민대중들의 투쟁의 역사가 소상히 눈에 어리여 온다. 그러면 나는 김혁이 작사, 작곡한 <조선의 >노래를조용히 불러본다.


주석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서 그분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갖게 되는 점은 또한 그이의민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신때문이다. 그이의 위대성은 바로 그분이민을 하늘같이 여기시고 속에 들어가시어민과 더불어민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데 있다. 이러한민을 하늘같이 여기시는 사상에서 주체사상이 태동하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자신의민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시었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힘에 의거할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생활의 본령이었다.


<이민위천>사상이야말로주석님의 모든 노작의 페이지마다 흐르는 근본사상으로서 그이께서 어려서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그이께서 어리셨을 중국으로 이주해서 사시게 되었지만 아버님은 그이를 일부러 고국에 보내어 학교를 다니시게 했다. 깊은 뜻은 바로 주석님께서 조선의 현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하시었다. 그이께서는 어려서 아버님의 권고로 조국에서2년간 공부한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시었는데 당시의 우리 조선인민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었다.


가장 귀중한 체험은 우리 인민이 어떤 인민인가를 깊이 리해하게 것이었다. 우리 인민은 소박하고 근면하면서도 용감하고 강의한 인민이었다. 어떤 곤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억센 인민, 예절이 바르고 인정이 풍부하면서도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인민이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연정회의 간판을 가지고 반동적인 〈자치〉운동을 벌리고 있었으나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들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힘으로써도 훼손시킬수 없는 민족의 존엄과 강철같은 독립의지를 뜨겁게 감수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인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인민을 조직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라를 찾을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의도대로 조선민족, 조선인민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주석님의 혁명사상은민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민이야말로 스승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라!, 구호는 주석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이 되었다. 주석님께서는 실로 인민적 품성과 인민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지도자로서 인민들 속에 들어가 직접 그들의 육성,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짓, 몸가짐을 자신의 눈과 , 손으로 손수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하시었다. 그것은 인민들 속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정치경제학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속에 들어가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과 같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믿고 계시던 주석님께서는 생전에 다음과 같이 생을 총화하시었다.


나는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 있다.


주석님께서 자신의 생신때마다 생일잔치상을 차려주려는 간부들의 성화를 뿌리치시고민들 속에 들어가 현지지도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시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석님께서는 두메산골, 외딴섬, 농장, 도시, 공장 조선 어느 곳이나 현지지도하지 않으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면팔방을 오가시며 인민들과 대화하시고 부탁하시고 인민들에게서 배우시며 한생을 사셨다. 그이께서는 항일혁명당시에도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꾸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당에 승인이나 받으려 하고 윗자리나 차지하려는 것을 비판하시면서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을 한다면서 대중을 떠나 자꾸 위로만 올라가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아래에 내려가 노동자,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자고 세대 청년혁명가들에게 당부하시었다.


주석님께서는 위로 올라가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아래 속으로 내려가자고 호소하시면서 《혁명가의 생명은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며 군중을 떠날 끝이 난다고 있다.》라고 강조하시었다. 주석님께서는 선행세대의 운동 전략이나 노선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의 운동 전략이나 노선은 결국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의 추동력인 인민대중을 믿지 않고 외면한 것이었기 때문에 붕괴된 것이라고 진단하시었다. 수백만 인민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 있겠는데 지난 시기 운동가들은 혁명도 독립운동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초기 혁명 운동가들도 기초축성은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쉽게 만들었으며 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1, 51파식으로 서로 분열되어 헤게모니싸움이나 벌렸다.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의 몰락도 결국 따지고 보면 속에 들어가민을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단결시켜야 했는데 단지 정권차원에서 행정명령식으로 내려 먹이는 방법으로민을 통치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혁명의 실패는 혁명의 주체이며 추동력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속에 들어가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신이 좋은 몇몇 사람들만으로는 혁명을 없기 때문에민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을 조직사상적으로 조직해야 된다고 그이는 믿으시었다.


내가 주석님을 존경하는 하나의 이유는 그이께서민을 통일단결시키셨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혁명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운동가들의 통일단결과 조직성원들과민대중의 일심단결을 이룩하여야 한다.


주석님께서 초기혁명투쟁을 전개하실 때도 운동권이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민족진영과 공산주의진영 속에서도 수많은 파들이 서로 싸우고 중상모략하며 역량을 낭비하고 있었다.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도 속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실제로 희생도 많이 되었다.


공산주의진영의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 종파분자들은 하나같이 공명주의와 소부르죠아영웅주의에 물젖은 행세군 들이었고 고질적인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로서 운동을 파괴분렬시키는데 광분하였다. 엠엘파들은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혁명의 동력이 될수 있다고 믿고 테로나 일삼고 김일성주석님을 중심으로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애써 꾸려놓은 조직을 파괴시키곤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민을 이간시켜 놓곤 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애국심>이라는공통적인 사상감정만 있으면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다같이 민족해방을 위한 하나의 궤도에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고 협력할 있다고 보시고 부단히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을 시도하시었다. 물론 그이께서는 <민족주의운동>한계점을 알고 계시었다.
민족주의운동은민대중을 떠나 상층운동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민들과 이탈하여 상층의 몇몇 사람들끼리만 모여앉아 말공부와 권력다툼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순수한 계급혁명이라면 엠엘파들이 주장하듯 노동자와 농민대중만이 혁명의 동력으로 되겠지만 조선혁명의 성격자체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인만큼 노동자, 농민은 물론 청년학생, 지식인, 애국적인 종교인, 민족자본가들도 혁명의 동력으로 보고 <민족해방>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집결하고 동원하자는 것이 주석님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이었다.


그이께서는 민족해방이라는 대전제를 첫자리에 놓는다면 어떤 민족운동진영과 어떤 계급, 계층과도 손을 잡을 있다고 보시었다. <민족> 첫자리에 놓고 모든 문제를 생각해야 된다,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도 있고 주의도 있지 민족이 없이 공산주의, 민족주의는 해서 무엇하며 하느님은 믿어 무엇하겠는가고 주석님께서는 물으시었다.


그이께서 생전에 차광수, 김혁, 최창걸을 포함한 무수한 혁명동지들을 잊지 못해하신 것은 그들이 과거운동에서 통일단결의 중심이 없이 각당, 각파가 저마다 영웅호걸행세를 하면서 파쟁으로 혁명운동을 말아먹던 교훈을 찾고 <영도의 중심>, <통일단결의 중심>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고 주석님을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단결의 역사를 피로써 개척했기 때문이었다.


인민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에서 처음으로 영도자와민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역사를 이들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