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2-06 01:33
좌경모험주의의 위험성
 글쓴이 : 최고관리자
 
좌경모험주의의 위험성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김일성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일생동안 <좌경모험주의>와 투쟁하였다. 김주석은 오랜 사색과 경험을 통하여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 조성된 <계급관계>와 조선혁명 앞에 제기된 과업으로부터 얻어낸 결론이었다. 조선민족이 수행해야 할 가장 절박한 혁명임무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인민을 억압하고 있는 봉건적 관계를 청산하며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김주석은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였다. 김주석은 당면한 <구체적 현실>을 선차적으로 중시하였다. 설사 고전에 없는 정식화이고 남들에게 없는 규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나라의 <실정>에 부합되는 과학적인 규정이라면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서슴없이 선택해야 한다고 김주석은 역설했다. 이것이 맑스ㅡ레닌주의에 대한 “창조적 태도”라고 김주석은 간주했다.



복잡한 계급적 관계에 처해있던 인민대중을 하나로 묶어세우기 위하여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오래동안 <반일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세우고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혁명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반일애국세력>을 하나의 강력한 정치역량으로 묶어세우기 위한 노선을 내세우고 그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몇 년동안 국내와 만주지방에서 피어린 투쟁을 꾸준히 벌려왔다. 그 과정에 그들은 많은 군중을 묶어세웠다. 그 군중들 속에는 애국적인 종교인도 있고 상공인도 있고 하급관리들도 있고 심지어는 지주들도 있었다. 그런데 좌경모험주의자들은 그들을 일률적으로 배척하였다. 그 결과로 어제까지 혁명을 지지하거나 동정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혁명을 외면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되었다. 조중인민들사이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김일성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통일전선 문제>를 가지고 오랜 시간 많은 토론을 하였다.
아버지는 지주인데 그의 아들이 혁명을 지지해나서는 경우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자본가로서 독립자금도 많이 내고 독립군에 대한 물질적 도움도 많이 주는데 공산주의자라면 덮어놓고 상대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면장으로서 왜놈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인민들하고도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들도 혁명에 포섭할 수 있는가? 이러한 <통일전선 문제>를 가지고 김주석은 많은 사색을 한 후 그러한 경우 본인의 <사상동향>을 위주로 하여 사람들을 평가해야 한다고 결론내리었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김주석은 반일사상을 지닌 진보적인 인사들을 많이 포섭하여 항일혁명에 참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김주석은 그의 친한 중국인 친구였던 장울화가 큰 부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송에 있을 때부터 그와 가깝게 지냈다. 어려서부터 지주가 착취자라는 일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울화와의 관계에서는 그것 때문에 구속을 받지 않았다. 사람이 어질고 양심적인데다가 반일감정이 강해서 거리를 두지 않고 가깝게 지냈으며 위급한 경우에 그로부터 많은 도움도 받았다. 김주석이 만약 평소에 지주의 아들이라고 장울화를 따돌리었다면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김주석을 돕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혁명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지지하지 않아도 일평생 호강하며 살 수 있는 장울화와 같은 부자의 자식들이 위급한 순간에 김주석을 도와준 것은 그들이 일제를 반대하는 애국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중국혁명의 선각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노동계급이나 농민과 함께 지식인들, 재산이나 있는 중국인들도 반일혁명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많이 참가하였다. 부유한 가정출신의 사람들도 인간의 자주성과 사회발전을 억제하는 모순점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혁명운동에 참가할 각오를 가질수 있다. 자산가출신들 가운데서 근로민중의 이익을 옹호하여 싸우는 투사나 선각자들이 배출되는 것은 그때문이라고 김주석은 보았다.



문제는 <출신>이 아니라 <세계관>에 있다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인생을 하나의 도락이라고 보게되면 혁명을 못하고 부를 누리는 것으로 그치고 말겠지만 도락을 못 누려도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되면 부자도 혁명에 참가하게 된다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계급혁명>이라고 하여 이런 선각자들까지 다 따돌리게 되면 혁명 그자체가 큰 손실을 보게 된다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그래서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반일애국세력>을 조직화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좌경모험주의자들은 그들을 일률적으로 배척해버렸다. 엠엘파계열의 좌경모험주의자들이 1930년 5월30일에 일으킨 5.30폭동과 1930년 8월 1일 국제반전일을 전후하여 길돈철도연선지방을 중심으로 또 다시 일으킨 무모한 폭동으로 그동안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이 힘들여 만들어 놓은 <통일전선>은 다 망가져버렸다. 어제까지 혁명을 지지하거나 동정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혁명을 외면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되었다. 조중인민들사이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좌경모험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모한 폭동으로 인하여 반일혁명 앞에는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었다. 8.1폭동으로 5.30폭동후 지하에 깊숙이 들어가 있던 얼마 되지 않은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조직들마저 적들 앞에 노출되었다. 만주각지에서 우수한 지도핵심들이 무리로 붙잡혀 처형되었다. 적들은 공산주의를 헐뜯고 공산주의운동을 탄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구실을 얻게 되었다. 좌경모험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두차례의 폭동 때문에 조선사람들이 중국사람들 앞에서 그만 신용을 다 잃게되었다. 동만의 조선사람들은 5.30 폭동과 8.1폭동을 겪고나서 <좌경모험주>의가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을 점차 심각하게 깨닫기 시작했으며 인민대중을 무모한 폭동에로 내모는 종파사대주의자들을 불신과 경계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후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은 간도지방에서 유격투쟁을 하면서 잃었던 신용을 힘들게 회복하였다. <좌경모험주의>를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겠다는 김주석의 결심은 간도땅에 와서 더 굳어졌다. 간도지방의 유격구에서도 <정권건설문제>를 둘러싸고 <좌경모험주>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정권건설에서의 좌경적 편향은 교조주의, 사대주의, 모험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의 소부르죠아적 조급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쏘비에트건설 노선>과 쏘비에트의 명의로 실시된 일부 시책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정권형태>에 대한 견해는 곧 그것이 어떤 성격의 혁명을 추구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이 김주석의 입장이었다.



카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정식화한데 기초하여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은 광복된 조국에 수립해야 할 정권은 왕조정치나 부르죠아의회제정치를 배제한 인민을 위한 정치제도, 다시말하여 노동자, 농민, 지식인, 민족자본가, 종교인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인민민주주의정권>으로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간도지방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면서부터 정권건설문제가 본격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를 유지하고 그것을 운영해나가자면 그 영역내의 인민들에 대한 “경제조직자적, 문화교양자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정권을 건설해야 하였다. 국가의 축소판이라고 할수 있는 유격구에 정권을 세우지 않으면 인민들을 먹여살릴 수도 없었고 그들을 투쟁에로 조직동원할 수도 없었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동만지방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은 1932년 가을부터 유격구역들에서 <정권수립>을 위한 역사적인 노정에 들어섰다. 그해 10월 혁명기념일을 계기로 왕청현 기야허에서는 군중대회를 열고 쏘비에트 정부수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연길현 왕우구와 삼도만에서도 쏘비에트가 수립되었다. 유격구역에 혁명정권이 선 것은 의심할바 없이 인민들의 세기적 소망을 실현시켜주는 의의있는 사변이었다.



처음에는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도 유격근거지들에 <쏘비에트정권>이 수립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명칭이야 어찌되었든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권이라면 그만이라고 보았다. 당시는 <쏘비에트 열풍>이 온 동만땅을 휩쓸던 때였다. 쏘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세계 각국의 혁명투사들과 진보적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인된 사조로 유행되고 전파되었다. 그 열풍은 구라파와 아세아를 가리지 않았다. 중국 서금의 <중화쏘비에트>와 월남의 <느구엔-딘 쏘비에트>의 수립은 그 좋은 예증으로 된다.



쏘비에트 노선을 지지하고 그것을 혁명실천에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의문의 여지조차 가질 수 없는 하나의 상식으로 되었으며 혁명적, 공산주의적 입장과 기회주의적 입장을 가르는 일종의 기준으로 되고 있었다.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나라의 공산당들과 공산주의조직들에서도 <쏘비에트정권> 건설을 지상의 과제로 내세웠다. 실로 쏘비에트는 전세계 무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상으로 되어 있었다. 쏘비에트가 그처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은 것은 그것이 온갖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청산하고 근로인민대중의 이익을 절대화할 복지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정권형태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상에 대한 동경은 인류가 세기를 두고 꿈꾸어온 소원이고 이상이었다. 러시에 수립된 청소한 쏘비에트정권은 착취계급의 반란을 분쇄하고 제국주의연합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고 경제를 복구하며 사회주의건설을 추진시키는데서 실로 이 세상 그 어떤 정권도 이루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인류가 쏘련을 등대로 바라보고 쏘비에트를 모든 정권형태들 가운데서 가장 우월하고 선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무리가 아니었다. 쏘련과의 접경지대였고 또 쏘련의 영향을 이모저모로 많이 받고있던 간도지방에서 소비에트에 대한 환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쏘베트의 시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들이 유격구 도처에서 울려나오기 시작하였다. 김주석은 유격구역을 돌아다니면서 인민들이 쏘비에트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하여 깊이 요해하기 시작했다. 여러 인민들과의 부단한 접촉, 그들과의 진지하고도 허심탄회한 담화는 김주석으로 하여금 쏘비에트정권이 빚어놓은 <좌경모험주의적> 시책의 후과를 전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유격구사람들이 쏘비에트를 좋지 않게 보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즉시적인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극좌적인 구호>밑에 사유재산의 철폐를 선포하고 토지와 식량으로부터 낫, 호미, 등과 같은 농쟁기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동산, 부동산들을 <공동소유>로 만들어버린 때부터였다. 쏘비에트정부는 <재산의 공유화>를 일사천리로 강행한 다음 유격구 안의 모든 주민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공동생활, 공동노동, 공동분배의 새로운 질서밑에서 움직이도록 하였다. 유치원생이 소학, 중학, 고등학교도 거치지 않고 대학으로 직행한 셈이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쏘비에트정부는 또한 큰 지주, 작은 지주, 친일지주, 반일지주를 가리지 않고 유격구 안에 있는 모든 지주들과 부농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였으며 마소와 양식까지도 일률적으로 수탈하였다. 동만땅이 소위 <적색구역>과 <백색구역>으로 분리된 후 적구로 내려가지 않고 유격구역에 남은 지주들은 대체로 반일감정이 강한 애국적인 지주들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왕청골 안에서 무장대오를 꾸릴 때 그들은 유격대에 대한 후원도 잘하였다. 그런데 쏘비에트정권은 이러한 반일정신이 강하고 지난날 유격구사업을 잘 도와준 지주들마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적구로 쫓아버렸다.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중국여자들의 귀걸이와 목걸이까지 압수하였다.



유격구를 다스리던 절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숭고한 <혁명적 이상>과 <따뜻한 의리>를 지닌 훌륭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며 정의로운 것을 열렬히 지향하였다. 그런데 그처럼 인정많고 분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 좌경모험주의 노선의 제창자, 집행자가 되었는지 김주석은 그 원인을 찾으려 심사숙고 하였다. 김주석은 그 원인을 <노선>에게 찾았고 그 노선을 작성한 사람들의 <사상적 미숙성>에서 찾았다. 실정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꼭대기에 앉아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칙과 선행자들의 경험을 통째로 직수입한 현실성이 없는 명령들을 마구 만들어 내 보내다보니 실천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김주석은 분석했다. 그당시는 무턱대고 배척하고, 닥치는대로 청산하고 타도하고 매장하는 것이 가장 철저한 <계급성>으로 인정되고 가장 선봉적인 혁명가의 표징으로 평가될 때였다.



좌경적인 쏘비에트시책이 빚어낸 후과로 하여 유격근거지에서는 수습하기 어려운 동요와 혼란이 생기었다. 많은 가정들이 쏘비에트시책에 불만을 품고 적구로 떠나갔다.
좌경모험주의 때문에 쏘비에트정부가 수립된 후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조중인민의 관계는 다시금 급격히 악화되었다. 청산된 지주들의 대부분이 중국인 지주들이었기에 조중인민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반일부대들은 이전날처럼 또 다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김일성주석과 그의 동지들이 투쟁해서 쌓아올린 <조중친선관계>의 모든 통일전선의 공적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인민이 잘 알지도 못하는 쏘비에트를 도처에 세워놓고 노동자와 빈고농의 독재를 부르짖으며 혁명이 다 된 것처럼 허장성세하였다. 간도일각에서 혁명정권이 태어나 온 세상에 자기 존재를 선포한 것은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었지만 쏘비에트노선 때문에 조중간의 <통일전선노선>이 침해를 당하고 있었다.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의 총적인 전략은 적을 최대한으로 고립시키고 절대다수의 인민대중은 모두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만에 조성된 좌경모험주의적 소비에트정부의 시책은 많은 문제를 낳고 있었다. 그러나 동장영동지를 비롯한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쏘비에트 정부의 시책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정권형태>는 <불가침>이며 쏘비에트를 건설하는 것은 <당중앙의 노선>이라고 강조했다. 김주석은 그 때의 현실적 상황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과업을 수행해야 할 동만지방의 유격구들에서 쏘비에트가 “실정에 맞지 않는” <정권형태>라는것이 생활적으로 증명된 조건에서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결단을 내려 정권형태를 바꾸고 인민의 이익과 실정에 맞는 정책을 실시하여 혼란상태에 빠진 시국을 수습해야 한다고 동장영을 비롯한 중국공산주의자들을 설복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노동계급의 정권형태는 <꼼뮨>과 <쏘비에트>라는 것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안을 대라고 하였다. 김주석은 프랑스 노동계급이 꼼뮨을 내올 때 그 어떤 고전을 참고했던 것이 아니었고 러시아의 쏘비에트도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의 고전에서 명시된 정권형태도 아니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김주석은 이 문제를 가지고 그의 동지들과 오래 동안 토론을 하였다. 각계각층 인민이라는 범주 속에는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아닌 광범한 근로대중이 포괄되기에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부는 <통일전선적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통일전선적 정권>이야말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성격에 부합되는 정권으로 될 것이라고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생각했다, 김주석은 <통일전선적 정부>를 세우되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적 인민혁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이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만지방에 적합한 정권형태로 <인민혁명정부>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반제반봉건민주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혁명의 성격에도 알맞고 인민의 요구에도 부합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권형태의 기준을 <인민의 요구>에서 찾고 <인민의 이익>을 얼마나 옹호고수하며 철저히 대변하는가 하는데서 찾았다. 정권형태를 <인민혁명정부>로 결정한 다음 그들은 어느 한 단위에서 먼저 시범을 창조해보고 그것이 좋다고 인정되면 다른 혁명조직들에도 일반화하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시범단위로는 왕청 5구가 결정되었다.



김주석은 왕청5구 주민들에게 앞으로 <쏘비에트정부>를 대신하게 될 정부로 <인민혁명정부>를 세우려고 한다는 것과 이 정부는 세계정권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로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격정에 넘쳐 선언하였다.

“이 정부는 조국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리익을 대변하고 옹호하며 그들의 숙망을 풀어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숙망이 무엇입니까? 당을 가지는것, 로동의 권리를 가지는것,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 만민이 평등하게 사는 것… 인민혁명정부는 이 모든 소원을 죄다 풀어줄 것입니다.”



주민들은 인민혁명정부 노선에 대한 김주석의 설명을 듣고 그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인민혁명정부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에 앞서 쏘비트정부가 몰수했던 개인의 재산들을 본인들에게 모조리 되돌려주었다.



왕청5구에 <인민혁명정부>가 수립된 얼마후 동장영동지와 동만지방에 온 국제당 파견원의 참석하에 노선전환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회의가 있은 후 동만지방의 모든 쏘비에트들은 <인민혁명정부>로 개편되었다. 사유재산철폐의 명목밑에 몰수하여 유격구인민들이 소비한 재산에 대해서는 인민혁명정부가 현금과 현물로 보상해주었다. <인민혁명정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다스리는 정부로서 절대다수의 인민대중에게는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적들에게는 독재를 실시하였다. <인민혁명정부>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였으며 유격구안의 모든 곳에서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였다. 인민혁명정부의 엄격한 요구에 따라 개인기업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종전의 2배나 되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인혁명정부는 유격구부락들에 아동단학교를 세우고 <무료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모든 주민들이 유격구병원들에서 <무상치료>를 받게 되었다. <남녀평등권>의 실시로 하여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사회사업에 참가하였다.



간도시절의 체험은 해방 후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이 <좌경모험주의>를 예방하고 <관료주의>를 청산하는 투쟁에서 큰 도움으로 되었다고 토로했다. 화려한 혁명적 언사와 구호의 뒤에서 좌경모험주의는 항상 인민대중을 우롱하고 억누르고 기만하며 공명과 출세를 꿈꾼다고 김주석은 평했다. 그 공명과 출세를 위하여 자기를 최전선에서 돌진하는 탱크나 장갑차로 묘사하는 것이 좌경모험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경각성을 높여 자기 진지에 좌경모험주의가 발붙일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김주석은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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