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2-27 01:50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민생단> 사건에 대한 분석
 글쓴이 : 최고관리자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민생단> 사건에 대한 분석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김일성주석은 <민생단>문제로 많은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간도의 유격근거지들에서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타도하는 사람들과 타도당하는 사람들사이에 모순이나 대립 같은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타도하는 사람들은 타도당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혁명대오에서 무자비하게 제거하였다. 숙청의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지난 날 혁명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바쳐온 검열된 투사들이었다. 그러면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이 해괴망측한 사태에서 적아를 식별해낼 수 있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누구를 적으로 보고 누구를 아군으로 보아야 하는가. 숙청지도부는 자기들이 처형한 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는데 이런 판결은 과연 합당한 것이었는가? 이것은 수많은 혁명가들의 출혈로 무섭게 비틀거리는 동만의 현실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제기하고 있던 물음이었다.



바로 이런 때에 리효석중대장이 북만원정에서 막 돌아온 김주석에게 <반민생단투쟁>의 사나운 회오리가 일고 있는 유격구의 실태를 상세히 보고해주었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간도에서 현과 구의 지도간부들과 중대급이상 유격부대 지휘관들은 거의 다 숙청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사람들 중 글줄이나 쓰고 연설이나 하던 사람들은 다 잡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북만으로 원정을 떠날 때 왕청에 남겨두었던 김주석부대 장병들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만한 정수분자들은 다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 민생단>의 조작은 조선에 대한 일제식민지통치의 지능화의 산물이었다고 김주석은 분석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민생단>을 꾸며낸 속심은 모략과 권모술수의 방법으로 조선혁명을 말살하자는데 있었다는 것이 김주석의 분석이었다. <무단정치>를 해도 안되고 <문화통치>의 비단보자기를 쓰고 “내선일체”며 “동조동근”을 부르짖어도 안되니 조선사람들 끼리의 골육상쟁으로 혁명세력을 숙청소멸함으로써 치안유지에서 당하는 고충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고 김주석은 지적했다. 9.18사변후 만주지방에서의 혁명정세의 급격한 발전에 큰 두려움을 느낀 일본 사이또총독은 간도시찰반 성원으로 동만지방에 파견된 박석윤과 연변자치촉진회의 거두 전성호, 연길주재 만주국군 군사고문 박두영, 수급반공특무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적인 민족주의 세력을 내세워 1932년 2월 연길에서 <민생단>을 조작하였다. <민생단>은 외형적으로는 “민족으로서의 생존권 확보”라든가, “자유락토 건설”이라든가,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허울좋은 구호를 내놓고 마치 조선사람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실제상에서는 조선민족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모해하여 인민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조중인민 사이를 이간시켜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킬 것을 목적으로 일제가 만들어낸 “간첩모략단체”였다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 민생단>의 반동적 본질은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의 “생활의 산업화”를 조선민족이 나아갈 “유일한 활로”라고 지적한 이 단체의 “조직취지”나 “강령’과 같은 문건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일제는 조선과 만주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통치 기간을 “생존권의 확보와 확충”을 위한 가장 좋은 “절대적 시기”로, 식민지통치 질서의 기반 밑에서 암흑의 세계로 변한 조선과 만주를 “자유”와 “자율”의 대지로 묘사하는 한편 간도일대에 조선인에 의한 “자유의 락토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치도 조선사람들이 일제의 만주강점과 식민지통치를 환영하며 간도일대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조성함으로써 조중인민과 조중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선린우호 관계와 혁명적 유대를 끊어버리려고 계획하였다는 것이 김주석의 분석이었다.



< 민생단>이 철저한 <반공주구단체>라는 것은 그 발기인이라는 사람들과 창립후 단장, 부단장,이사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의 경력만 보아도 쉽사리 판단할 수 있다. 이 조직의 발기인들로서 경성갑자구락부 이사 조병상이나 [매일신보] 부사장 박석윤, 연변자치촉진회의 전성호, 김동한, 등은 다 애국애민을 부르짖는 민족주의자, 혁명가로 자처하였으나 모두 일제가 오래동안 길들여온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일제는 <민생단>의 간판을 “민생고의 해결”이라는 구호를 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동만의 혁명조직들은 그 단체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영사관의 뒷문으로 자주 드나드는 것을 간파하였다. 적들은 만인의 예리한 시선 앞에서 <민생단>의 정체를 오래 숨겨둘 수가 없었다. 조선유격대는 혁명적 출판물들과 구두강연을 통하여 그 정체를 밝히는 한편 반민생단투쟁을 전군중적 운동으로 벌렸다. 간판에 현혹되어 멋도 모르고 <민생단>에 들었던 사람들이 이 조직을 탈퇴하였으며 주구로 전락되어 암해공작에 나섰던 자들은 군중의 손에 의해 적발처단되었다. <민생단>은 창립후 얼마 못되는 사이에 해체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민생단>이 아닌 사람들이 민생단으로 몰려 계속 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당이 있고 인민정권이 수립된 간도의 유격구들에서 3년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모략에 있었다는 것이 김주석의 분석이었다. 민생단은 1932년 4월 조선주둔군의 간도파병과 함께 신임총독 우가끼의 의사에 따라 해체되었으나 그것을 부활시키기 위한 운동은 김동한, 박두영 등을 축으로 하여 비밀리에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1934년 봄에 연길헌병대장 가또 하꾸지로와 독립수비보병 제7대 대장 다까모리 요시는 박두영을 비롯한 친일분자들과 함께 간도의 치안문제를 다시금 협의하면서 민생단조직을 부활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리하여 민생단 모략공작의 두번째 단계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민생단조작이 만주성위산하의 동만특위를 상대로 하는 사상모략시책임을 명백히 하고 활동의 기본골자를 첫째로 “조선인유격대에 대한 강력한 자체붕괴분단 시책”, 둘째로 “조선인유격대에 대한 양도차단 시책”, 셋째로 “조선인유격대에 대한 적극적인 투항귀순 권고”, 넷째로 “투항귀순자에 대한 보호, 정주감시 시책”,다섯째로 “투항귀순자에 대한 직업훈련, 생업알선”에 두었으며 연길헌병대가 모략활동 전체를 통괄하도록 하였다. 1934년 9월에는 민생단활동이 강화되는데 따라 생기게 될 “귀순투항자들을 일괄처리하며 귀순자의 배후관계, 위장귀순유무 확인, 세뇌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기관으로 <간도협조회>를 만들어내었으며 여기에 민생단을 통합하였다. 김동한을 우두머리로 하는 <간도협조회>는 동만특위의 반민생단투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여러가지 음모활동을 감행하였다.


일제의 음험한 모략가들이 공산당과 항일유격대를 상대로 한 사상모략공작의 기본바탕으로 삼은 정치적 요점은 동만항일유격대의 조직구성과 지휘체계에서의 특수성이었다. 그들은 인민혁명군이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공동의 무장력이라는 점을 하나의 본질적인 약점으로 간주하였다. 일제의 모략가들은 제나름으로 중국인 간부들은 조선인 당원들을 신용하지 않고 부단히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인 당원들과 대립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바로 이 특수성을 이용하여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하였다. 조선사람이 만주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조선의 독립과 민족해방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왜 역량상 우세한 조선사람들이 중국사람들에게 끌려다니며 무의미한 싸움에서 피를 흘리는가, 투항귀순의 길은 열려있다, …이러한 사상을 열심히 주입시키는 것을 민생단 사상모략공작의 주요한 선전요령으로 삼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민생단이 해체된 후 특무들과 주구들을 발동시켜 유격구들에 민생단원들이 수없이 침투된 것처럼 소문을 내돌리면서 견실한 간부들과 혁명가들을 모해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서로 상대방을 의심하고 경원시하게 하였다. 적들 자신도 “간도공산당 파괴경험”이라는 비밀문건에서 처음에 민생단을 10명씩 조직하여 유격대 안에 들여보냈으나 다 붙잡혀 죽게 되어 더는 침투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사람과 중국사람, 노동자와 농민, 상부와 하부간에 서로 믿지 못하게 하고 서로 이간시키는 전술을 써서 공산주의자들끼리 싸우게 하였다고 실토하였다. 혁명대열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교란작전에서 일본의 모략가들이 발휘한 솜씨는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다고 김주석은 지적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의 길을 걷게 된 다른 하나의 이유는 만주성위나 동만특위, 각급 현당과 구당조직의 책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형형색색의 일부 <좌경모험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불순한 정치적 야망에 있었다. <좌경모험주의자들>이 공산주의대열 안에서 지도적 지위를 독차지하고 상승일로의 길로 전진하고 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혁명투쟁을 자기들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는데 종속시키려고 하였다면 파벌근성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대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지와 묵인 속에서 종파적 목적달성에 장애가 되는 모든 사람들을 대오로부터 사정없이 제거하고 자파세력을 확대하는데 이 투쟁을 악용하려고 하였다.



남들이 차지하고 있는 방석을 가로타고 앉을 구실을 마련해준 것이 바로 민생단이었다. “너는 민생단이니 자리를 내놓아야겠다”거나 “죽어야겠다”고 선언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판결에는 상소가 있을 수 없었으며 또 상소를 해보았자 통하지도 않았다. 일제가 유포시킨 민생단 침투설은 당과 대중단체, 군대의 모든 책임적 자리를 자파일색으로 갈아치우려하는 사람들의 패권주의적이며 출세주의적인 욕구에 불을 붙여주는 인화물질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이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올리는 숙청실적은 유격구의 혁명역량을 모조리 교살해치우려는 모략가들에게 끝없는 이득을 가져다주었다고 김주석은 개탄하였다. 결국은 적아가 합세하여 유격구를 마구 짓뭉개놓은 이런 기괴한 결탁은 세계의 어느 혁명전쟁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김주석은 탄식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이 이처럼 파쑈국가의 군법이나 중세기의 종교형벌조차 무색케 할 정도로 황당하고 가혹하고 졸열한 방법으로 진행된 것은 일제의 간악한 모략과 그에 속아넘어간 동만특위의 일부 사람들의 정치사상적 목매무지와 그들이 추구한 목적의 비열성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좌경모험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민생단> 모자를 씌우고 극형에 처했거나 유격구밖으로 추방한 사람들은 대체로 목숨을 아낄줄 모르는 용감한 혁명가들이었다. 처창즈에서만도 수백명의 조선사람들이 민생단으로 몰려 학살되었다고 한다. 간도의 실정에 밝은 주보중동지도 자기의 회상록에서 민생단에 걸려 죽은 사람의 수가 2,000명이나 된다고 증언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을 진두에서 지휘한 사람들은 숙청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들로서는 감히 자행할 수 없는 악착스러운 방법으로 당조직과 대중단체 성원은 물론, 아동단열성자에 이르는 모든 민생단혐의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하였다. 유격구의 인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동요하였다. “혁명이라는 것이 그저 그렇더라, 걸핏하면 저희들끼리 서로 죽이고 없는 죄도 만들어내고 그저 그 모양이더라, 조선사람들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간도 땅에서 농토도 개척하고 혁명도 개척했는데 그 선구자들을 다 잡아죽이니 이게 도대체 무슨놈의 심보인가, 이거야 영도권을 잡기 위한 숙청이 아니고 무엇인가, 권력을 위해서 지난 날의 의리나 인연마저 다 버리고 자기편을 서슴없이 학살하는 것이 혁명이라면 이따위 혁명은 해서 뭘해, 이런 도깨비놀음을 할바엔 차라리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든가 하다못해 산중에 들어가 중이 되어 목탁이라도 두드리며 돌아다니는게 낫지 않겠는가”고 사람들은 쓴 입을 다시며 생각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의 미친바람은 이처럼 사람들의 <인생관>과 <혁명관>에 녹이 쓸게 하였다고 김주석은 회고했다.



군중들은 자연히 혁명을 버리고 적구나 무인지경으로 도주하게 되었다. 혁명을 하려고 왔다가 혁명한테서 구박을 당하고 허공중에 뜬 신세가 되었으니 그들이 정을 붙이고 살아갈 곳은 과연 어데란 말인가. 혁명이란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죽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도 사람답게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혁명이며 죽어도 정의를 위해 한몸을 아낌없이 바치다가 싸움터에서 값있게 죽어 영생을 얻는 것이 혁명이다. 혁명가들은 영생은 커녕 어제까지 한가마밥을 먹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도살당하였다. 무지한 살륙으로 하여 왕청의 강들과 고동하의 물이 선혈로 물들여졌고 간도의 어느 골짜기에서나 통곡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이처럼 반민생단투쟁의 사나운 회오리가 동만의 유격구들을 한창 휩쓸고 있을 때 민생단숙청을 벌리던 좌경모험주의자들에게 김주석은 다음과 같이 질타하였다.

“민생단을 숙청한다고 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생사람을 잡는데 대해서는 수수방관할 수 없다, 죄도 없는 자기편 사람들을 모두 잡아죽이는 것이야말로 혁명을 파괴하는 이적행위인데 우리가 어찌 그런 행위를 보면서도 함구무언할 수 있겠는가, 보라, 당신들이 <민생단>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놓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 유격구에서 우리와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쟁쟁한 싸움군들이 아닌가, 그런 싸움군들이 무엇 때문에 혁명을 반대하는 <민생단>이 되겠는가, 당신들이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좌경모험주의자들은 김주석의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면서 김주석이 반민생단투쟁노선을 반대하느냐고 큰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김주석은 혁명에 충실한 자기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반민생단투쟁노선이라면 그는 그런 노선을 지지할 수 없다고 강하게 논박하였다. 김주석은 그들에게 민생단을 잡아내려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똑똑히 잡아낼 것이지 하필 왜 이 산 속에서 배를 곯으며 혁명을 하느라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지 그 이유를 대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동만특위의 좌경모험주의자들은 김주석이 민생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였다.



김주석은 중국의 동장영동지를 만나서도 민생단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지며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내 보기에는 당신들의 사업에 문제가 있다. 반<민생단>투쟁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함부로 잡아가둘 수 있는가? 반<민생단>투쟁은 민주주의적으로 해야 한다. 상층에 있는 몇몇 권력자들의 독단이 아니라 대중의 토의를 거쳐 적아를 정확히 식별해내야 한다. 고문과 위협의 방법으로 없는 <민생단>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김주석은 좌경모험주의자들에게 유격대 안에 있는 <민생단>은 정치부의 승인이 없이 마음대로 다치지 못한다고 선포하였다. 권력에 환장한 천박하고 암둔한 인간들이 색안경너머로 만사람의 진가를 가늠해보며 검사나 판사나 형리의 행세를 하고 있을 때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동지를 동지로 대하며 인민을 인민으로 섬기는 <믿음의 정치>, <사랑의 정치>를 펼쳐나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야 했던 투쟁이었다고 김주석은 회억하였다. 만사를 민생단의 작간으로 보는 불신의 감시망 아래서 자기를 건져낼 수 있는 최대의 보신책은 사실 아무 일에도 참견하지 않고 보고서도 못본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주석은 그른 것을 보고서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도 죽은 목숨과 같고 구태어 살 필요조차 없는 생명없는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불의로 보이는 모든 것을 향하여 반기를 들었다. 일신의 안위만을 걱정한다면 그것이 무슨 혁명가이겠는가. 김주석은 숙청의 회오리가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모두가 한몸을 내대고 투쟁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개별적인 군인이 내리는 한마디의 명령이나 한번의 손짓에 따라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험악한 <계급투쟁>의 마당에서 혁명가의 냉철한 이성과 분별력은 고사하고 초보적인 인정이나 의리마저 저버린 목석같은 인간들의 도전을 순간마다 당하면서도 김주석이 그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의 신념에 따라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은 것은 백지장처럼 깨끗한 김주석의 경력과 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전투성과와 이론적 뒷받침의 덕이었다고 김주석은 생각하였다. 또한, 간도에서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던 중국인간부들 중 적지 않은 인물들이 길림시절부터 김주석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사람들이어서 그들이 김주석만은 함부로 <민생단>으로 걸지 못하였다고 김주석은 판단하였다.



이 비참한 민생단사건은 김주석으로하여금 조선의 혁명가로서 자기에게 지워진 책임을 두고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혁명이 이 모양, 이 꼴대로 타살되고마는가, 아니면 부활하여 다시 일어서는가 하는 엄숙한 시점에서 만일 수천수만의 생명들을 위협하는 숙청의 무분별한 살인망동을 저지시키지 못한다면 김주석 자신도 조선의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으며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살아남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주석은 반민생단투쟁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회의를 소집할 것을 동만당지도부에 제기하였다. 만주성위의 순시원도 때를 같이하여 이러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리하여 다홍왜에서 동만지방 군정간부들의 연석회의가 소집되었다.



김주석은 다홍왜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김주석의 출발을 앞두고 조선유격대원들은 모두 불안해하였다. 1935년 2월이면 만주성 공산당이 동만 각급 당부와 전체 당원들에게 전당을 볼쉐비크화하기 위하여 숙청공작과 좌우경을 반대하는 투쟁을 강하게 전개하여 당내에 침입한 반혁명분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파쟁주의, 민족주의, 사회개량주의를 청산구축할데 대한 비밀지령을 하달한 뒤였다. 이 지령이 하달된 후 동만각급 당조직들에서는 반민생단투쟁이 더욱 극좌적으로 무자비하게 전개되었다.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김주석과 좌경모험주의자들사이의 논쟁은 그때까지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당과 군대, 공청의 주요간부들이 다 모이는 다홍왜회의에서는 논쟁이 <공식적인 형태>를 띠고 첨예하게 벌어질 것이다. 좌경모험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이 감주석 하나라면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10이나 20명도 넘을 수 있다. 민생단문제가 일정에 오르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대체로 다 입을 봉하는 것이 전례이니까 김주석은 좌경모험주의자들의 포위 속에서 전체를 향해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논쟁은 김주석을 단죄하는 성토장으로 되고 회의장은 김주석을 매장해버리는 재판장으로도 변할 수도 있다. <민생단>이라고 하면서 김주석을 정치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장해버리려는 극단한 시도도 있을 우려가 없지 않았다. 동지들은 바로 그 점을 제일 걱정하였다. 그래서 동지들은 사색이 되어 김주석이 다홍왜로 가는 것을 애걸하며 말렸다.



그러나 김주석은 다홍왜를 향하여 길을 떠나면서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하였다.

“동무들, 이 길은 죽든지 살든지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다. 내가 만일 다홍왜로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멸을 가져올 뿐이다. 우리 앞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운명을 구원하고 조선혁명을 위기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기회가 왔다. 대결은 피할 수 없고 흑백은 반드시 갈라져야 한다.”


김주석은 몸살감기로 몸이 성치못한 상태에서 오대성동지와 다른 한명의 전령병의 부축을 받으며 회의가 시작된지 이틀만에야 다홍왜에 도착하였다. 인민혁명군대원들의 엄한 경호조치가 실시되고 있는 제8구 농민위원회 사무소에서 만주성 당파견원 위증민동지가 왕윤성, 주수동, 조아범, 왕덕태, 왕중산을 비롯한 동만당단특위의 간부들과 함께 김주석을 맞아주었다. 이 사무소건물에서 바로 중국사람들이 <동만당단특위연석대회>라고 규정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조선에서는 이 회의를 <다홍왜회의>라고 부르고 있다. 다홍왜회의는 약 10일가량 진행되었다. 출석자의 대부분은 중국사람들이었고 조선족출신으로는 김주석과 송일, 림수산, 조동욱을 비롯한 몇몇 간부들 뿐이었다. 김주석은 동만당 특위위원의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다홍왜에서 회의가 소집되게 된 동기는 공청 만주성위 순시원의 자격으로 간도지방의 사업을 요해하러 내려왔던 종자운이 동만지방 조선사람들의 70%가 민생단이라는 허황한 보고를 성당조직에 제출한 때문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동만혁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만주성당이 대표를 동만에 급파하여 수습책을 강구하려고 한 것은 응당한 일이었다.



논쟁은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였다. 논쟁이 열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종자운이 보고에서 동만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70%, 조선혁명가들의 80~90%가 <민생단>이거나 그 혐의자들이며 유격구가 <민생단>의 양성소라는 종래의 견해를 되풀이한 순간부터였다. 회의분위기는 종자운의 보고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숙청공작위원회를 강화해야겠다는 발언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민생단>숙청은 혁명으로 대내의 반혁명을 포위섬멸하는 특수전이라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민생단>이 뿌려놓은 씨종자들을 보다 철저히 무자비하게 뿌리채 뽑아내야겠다고 하였다.



이때 김주석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다.

“동만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가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라면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나와 기타 조선동지들도 다 <민생단>으로 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당신들은 지금 <민생단>과 마주앉아 회의를 하는가? 우리가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지 않고 여기에 불러다놓고 정치를 상론하는가? 동무들이 찍어놓은 그 수자 속에는 싸움터에서 전사한 혁명가들도 포함되는가? 만일 포함된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항일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일본놈들이 자기편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 것으로 되는데 그들이 모처럼 키워놓은 민생단원들을 그렇게 죽일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 회의장을 호위하고있는 1중대의 80~90%도 <민생단>으로 보는가?”



이 질문으로 하여 술렁거리던 회의장 안에서는 갑자기 이상한 차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사람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집행석에 앉아있는 위중민동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김주석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변론하였다.

“다 알다싶이 어떤 물질이든지 본래의 구성요소와 다른 요소가 80~90% 이상을 차지하게 되면 그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이다. 동만에 사는 조선사람의 70%가 <민생단>이라는 것은 로인들과 아녀자들을 제외한 조선족청장년들 전부가 <민생단>이라는 말과 같은데 그렇다면 동만에서는 <민생단>이 혁명을 하고 있으며 <민생단>이 자기 상전을 반대하는 혈전을 벌리고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동만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데 이것 역시 리치에 맞지 않는 소리이다. 그들이 만일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3년동안이나 만성적인 봉쇄상태에 놓여 있는 유격구들에서 엄동설한에 집도 없이 입을 것도 입지 못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적들과 힘에 겨운 싸움을 하여왔겠는가. 조선혁명가들의 80~90%는 고사하고 그 십분의 일인 8~9%만 <민생단>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이자리에서 마음놓고 회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회의장 주변에서는 지금 조선사람들로 편성된 1중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우리들에 대한 경위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자리에는 몇해째 적들이 소멸하지 못해 애를 쓰는 동만지방의 이름난 혁명가들과 지도핵심들이 다 모여 있다. 당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1중대 성원들도 거의나 <민생단>이겠는데 그들이 좋은 총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습격하여 일망타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모두가 <민생단>이라고 생억지의 주장을 하던 자들은 이 물음에도 역시 답을 하지 못하고 조용하였다. 김주석은 토론을 계속하였다.

“1중대는 원래 당신들이 <민생단>중대라고 선포했던 불우한 중대이다. 우리가 20일 가량 중대에 직접 내려가서 료해해본데 의하면 중대전원을 <민생단>으로 볼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20일간의 지도검열과정을 통해 1중대는 모범중대로 되었고 여기서 7중대가 새롭게 태여나기까지 하였다. 실천투쟁을 통해 검열된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동만유격구들에 사는 조선사람들이나 조선혁명가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로 되고 있다. 보고에서는 유격구를 <민생단>의 양성소라고 하고 당, 단조직도 <민생단>조직이라고 하였는데.…그렇다면 동만당이나 왕청현당이나 인민혁명군 1사를 모두 <민생단>조직으로 보아도 되겠는가? 동만당간부들을 <민생단>의 조종자, 지도자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는가?”



회의 참석자들은 이 물음에도 침묵하였다. 성당 파견원으로서 이 투쟁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종합분석하고 평가할 사명을 걸머진 위증민동지만이 당, 단 조직자체를 <민생단>조직으로 보는 것은 착오이며 부분과 전체는 반드시 구별해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장내에 조성된 긴장도를 약간 풀어놓았다.



김주석은 동만인민의 대부분을 <민생단>이라고 낙인하는 것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며 이 견해는 이번 회의에서 당장 시정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조아범은 김주석이 민생단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지금 수백명이 민생단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음을 지적하고 이들 자신들이 민생단에 가입했다고 스스로 자백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김주석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자백이나 자백서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증거자료들이라는 것이 대부분 고문장에서 강제적인 방법으로 받아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옥에 가서 자백을 했다는 혐의자들을 수십명이나 만나보았는데 자기의 자백을 인정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당신들의 그 증거자료보다 사업과 생활을 통해 발휘된 그들의 충실성을 더 믿는다. 당신들이 자백과 자백서를 어떻게 받아냈는지. ...당신들이 <민생단>이라고 몰아대는 혐의자들의 대다수는 <숙반>의 집행자들에 의해 가해지는 육체적 고통에 견디지 못해 가짜 자백을 한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지금 <민생단>아닌 <민생단>을 마구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조아범이 “아니다!”라고 소리쳤다.
김주석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쾅 하고 내리치면서 조아범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치며 말했다.

“간도의 조선사람들은 지금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당신이 직권을 악용하여 사람잡이를 망탕 했기 때문이다. 안도유격대 정치위원 김정룡이 누구한테 죽었는가? 화룡현 당 서기 김일환은 누구 손에 죽었는가? 오늘 이자리에서 솔직히 대답해보라. 길림시절의 조아범은 포악하지도 않았고 탐위욕도 없는 사람이였다. 김일환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분해서 울었다. 그 사람이야 당신의 혁명선배가 아닌가. 당신이 그를 구제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죽이기까지 한단 말인가.”



사실상, 김일환동지는 노숙하고 경험많은 정치일꾼이었다. 그는 간도지방 공산주의자들 속에서 본보기로 내세울 수 있는 가정혁명화의 선구자라고 김주석은 평가하였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모두가 이름있는 혁명가들이었고 혁명을 하다가 순국한 열렬한 애국자들이었다. 김일환의 어머니, 오옥경, 그의 안해 리계순, 동생 김동산, 김일환의 4촌, 김정식, 그리고 김일환의 처가편 사람들도 혁명에 한생을 바쳤다. 이러한 혁명가집안의 한사람으로서 화룡유격대 창건자의 한사람인 김일환을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사형시켰다.



김주석은 계속하여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따져 물었다.

“그래 당신들은 정말로 김일환을 <민생단>이라고 생각하였는가? <민생단>이 아닌줄 알면서도 딴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총살하지 않았는가? 김일환과 같은 사람들이 <민생단>이라면 이 간도땅에서 <민생단>이 아닌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동무들, 이제 더는 인간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지 말라.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고 동지들을 동지답게 대하며 민중을 민중답게 대하라. 우리는 인간애와 동지애, 민중애의 무기를 가지고 이 세상을 개조하고 변혁하기 위해 일어난 투사들이 아닌가. 이 사랑의 무기가 없다면 우리가 부르죠아지들이나 마적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이상 <숙반>의 이름을 걸고 사람들을 우롱한다면 인민이 영원히 우리를 외면할것이며 후대들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민생단>의 루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된 수천명 렬사들의 죽음을 보상하는 길은 오직 우리가 이 무의미한 살륙을 중단하고 사랑과 믿음과 단합의 정치로 모든 힘을 항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적들이 던진 <민생단>의 미끼를 뱉아버리고 우리의 대오에서 종파주의, 배타주의, 모험주의가 발붙일 틈을 주지 말라. 이것만이 지난 몇해동안 <민생단>으로 생긴 상처를 가시고 민중을 구원하고 혁명을 구원하며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뉴대를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우리 두 나라 혁명가들의 진정한 화합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호상리해, 계급적 믿음에 기초해야 하며 형제적 우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공동투쟁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느 일방이 리기를 추구하거나 그 리기를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킨다면 그러한 합작은 공고한 것으로 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의 화합은 믿음과 사랑을 원동력으로 할 때 영원히 불패의 것으로 될 것이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이 또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반격을 하였다. 그 사람은 <민생단>의 아버지는 종파이고 종파의 아버지는 민족주의이며 민족주의의 아버지는 일본제국주의라는 괴이한 주장을 하였다. 김주석은 그 궤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격을 가했다.

“사상이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 민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꾸준한 개조과정을 통하여 공산주의자로 될 수 있다. 과거경력 중에 민족운동에 참가한 사실이 있다고 하여 그런 사람을 종파의 아버지라거나 일본제국주의의 아들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 아닌가. 원래 민족주의의 리념적 기초는 애국애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큼 그것을 반동시하는 것은 곧 애국주의를 반동시하는 것으로 된다. 민족주의라고 하여 덮어놓고 이단시하지 말라. 민족주의가 부르죠아지의 사상적 도구로 리용되지 않는 이상 그것을 무턱대고 배척할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가 력사의 반동으로 되는 것은 다만 온 민족이 아니라 부르죠아지만의 리해관계를 대변할 때 뿐이다. 만일 그 누가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창시한 손문선생을 제국주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그런 망발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민족주의를 반대한다는 그 자체가 심한 민족적 편견이다. 조선의 종파분자들과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적진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이 소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파쟁이 마치 조선민족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기질인 것처럼 여기며 조선공산주의자라면 의례히 종파와 무슨 관련이 있는듯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이것 역시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이다. 털어놓고 말해서 종파는 조선공산주의대렬 내에만 있은 것이 아니다. 종파는 독일과 쏘련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있으며 일본에도 있고 국제당에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조선사람들만이 종파적 습성을 기질적으로 소유한 민족으로 인정되여야 하며 조선공산주의자라는 이름이 왜 종파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져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지금 조선민족은 과거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서 실패한 소수민족으로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 성공이 불가능하다느니, 혁명투쟁에서 동요성이 많고 반동화되기 쉬운 민족이라느니 하면서 간부로 쓸 수 없다는 론거를 들고 나오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인간부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꾸며낸 허황한 론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배타주의적 립장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신들은 이미 동만의 군정관계간부들 중에서 당신들과 함께 여러해동안 한 전호에서 충실하게 싸워온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수십수백명 제거하거나 <민생단>으로 몰아 학살하였다. 수많은 지도핵심들이 소수민족이라는 리유로 자기 자리를 내놓았는데 아직도 더 제거해야겠는가. 당신들이 만일 지금과 같이 조선사람들을 배척하고 학대하는 길로 집요하게 나간다면 우리는 그러한 곁방살이를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김주석의 폭탄 같은 말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고 김주석을 바라보았다. 회의가 심화됨에 따라 김주석과 좌경분자들사이의 논쟁은 더 치열해졌다. 회의장에 참석했던 몇명의 조선인간부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만 지키었다. 위증민동지와 왕윤성동지는 공식적으로는 자기들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지만 내적으로는 김주석의 주장에 이해를 표시하였다. 특히 위증민동지의 이성적 판단과 공정한 태도는 김주석에게 큰 도움으로 되었다.



다홍왜회의에서 시작된 논쟁은 그해 3월에 열린 <요영구회의>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회의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김주석의 주장을 지지하였으며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도 의견상의 차이는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미결로 남게 되었다. 조선유격대는 두 회의의 논쟁에서 핵으로 되어 있는 몇가지 문제들을 국제당에 제소하기로 하고 그에 대한 결론을 받기 위하여 위증민동지와 공청동만특위 간부인 윤병도동지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민생단>문제로 하여 파생된 간도지방의 혼란은 일종의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좌경모험주의자들은 무분별한 숙청운동으로써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간고한 투쟁을 통하여 힘들게 축성해놓은 혁명의 기초를 거의나 허물어버렸다. 숙청운동은 2,000여명의 자기편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학살하였다. 이것은 세계공산주의운동 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으로서 우매와 무지와 몰상식의 극치었다. 조선과 해외 각지에서 청운의 뜻을 품고 간도지방에 모여들었던 끌끌한 혁명가들이 2~3년사이에 숙청의 총끝에서 다 죽었다. 그 불우한 수난자들 가운데는 별의별 인재들이 다 있었다. 숙청의 미친 바람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항일혁명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민족의 자랑스러운 혁명가들을 사정없이 쓸어갔다.



< 민생단>의 여파로 죽은 사람들의 수가 전장에서 싸우다 쓸어진 사람들의 수를 능가한다면 아마 후대들은 잘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항일전쟁의 역사는 무수한 적과의 교전을 기록하고 있지만 한 전투에서 20~30명의 전사자를 낸 실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동만의 유격구들에서는 20~30명의 혁명가들이 <민생단>이라는 죄명을 쓰고 무리죽음을 당한 날도 많았다.



다홍왜회의의 논쟁과 그후 국제당이 내린 결론으로 하여 처형된 사람들도 무죄로 판명되었다. 육체적 생명은 회복될수 없었지만 <정치적 생명>은 부활되었다. 이 회의의 다른 하나의 의의는 일제의 음험한 모략이 얼마나 간악하고 지독했는가 하는 것과 그에 농락된 자들의 정치적 졸열성을 고발함으로써 좌경모험주의자들의 정치적 쿠테타에 자갈을 물리고 그 손발을 철저히 얽어맨데 있다. 숙청의 좌경화는 곧 높은 직권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낮은 직권을 가진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소멸하기 위하여 공개적인 방법으로 단행한 정치적 폭행이며 하향식 쿠테타였다.



다홍왜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동만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사람들 속에서 김주석의 활동이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민생단문제에 대한 김주석의 분석은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분열와해시키려는 적들의 모략과 간계는 어제만이 아니라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며 민족배타주의와 좌경분자들의 정치적 졸열성은 지금도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똑똑히 인식시킴으로써 후대들에게 조선혁명의 주체확립과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된 교훈을 심어주자는데 있다고 김주석은 강조하였다.
김주석은 반민생단투쟁과 그 총화로서의 다홍왜회의 과정을 통하여 <자주성>은 민족의 첫째가는 생명이라는 것과 이 자주성을 고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 특히는 그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장깊이 절감하였다. 인간의 첫째가는 속성이 <자주성>인 것처럼 민족의 생존을 담보하는 첫째가는 원천도 <자주성>에 있다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개별적인 인간들의 생활에 있어서나 민족을 이루는 대집단의 생활에 있어서나 그 운명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생존조건은 <자주성>이라고 김주석은 강조했다. 조선유격대가 항일혁명을 <민족적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성전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주권의 부활이야말로 조선인민이 수십년 동안 절절히 품어온 일차적 숙망이었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의 강령으로 내세운 지상의 과제였다고 김주석은 역설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해방투쟁의 <총적목표>였다고 김주석은 판단하였다.


김주석은 <자주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주었다.

“자주성이란 그 누가 만들어서 선사하는 것도 아니며 시간의 루적과 더불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투쟁을 통해서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백절불굴의 희생적인 투쟁정신을 발휘하는 사람들만이 자주성을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구상에는 다른 민족의 자주권을 짓밟는 강도들이 너무나도 많기때문이다. 자기네가 자주성을 가지는 것은 응당하다고 여기면서도 남들이 자주적으로 살려는데 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해하는 인간들도 수두룩하다. 자주성을 저들만이 점유할 수 있는 독점물로 여기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지배주의의 오만성이다.”



만일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이 인정사정없는 <좌경모험주의>의 철권 앞에서 질겁하였거나 희생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하였더라면 그들은 미친듯이 질주하는 그 좌경의 무한궤도밑에서 혁명을 구원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한 것은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강의한 희생정신과 공산주의적 원칙성, 자기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불변의 신념이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김주석은 반민생단투쟁 과정을 통하여 일상 생활에서나 혁명투쟁에서 모함과 모해가 얼마나 유해로운가 하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으며 종파를 하는 사람들과는 혁명을 같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심각하게 받았다고 진술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모자식사이, 형제사이에도 칼부림을 하는 것이 바로 반동화된 인간들의 본성이며 종파의 악습이라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해방후 적들은 일제가 적용했던 민생단의 수법을 이용하여 조선 내부를 와해시켜보려고 시도하였다. 한때 그들은 위조편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백남운, 강영창, 최응석과 같이 당에 충실한 남조선출신 간부들을 모해하려고 하였다. 김주석이 그 모해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유격구에서 겪은 반민생단투쟁 경험의 덕이라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김주석은 새 사회안전부장이 임명될 때마다 매번 우경을 범해서도 안되지만 좌경을 경계하며 민생단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군 하였다. <좌경모험주의>는 정치적 사기군들과 야심가들이 새형의 민생단소동을 창출해낼 수 있는 온상이이라고 김주석은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리었다.

“이 온상의 주인들은 남들보다 10배나 20배쯤 더 높은 목소리로 당을 운운하고 혁명을 운운하고 충실성을 운운한다. 우경이 공개적인 반혁명이라면 좌경은 은폐된 반혁명이고 우경이 암이라면 좌경도 그에 못지 않은 독버섯이다. 우경과 좌경은 혁명이라는 하나의 거목위에 기생하면서도 서로 등을 돌려대고 동상이몽하는듯 하지만 실은 하나의 맥락으로 깊이 련결되여 있다. 개인이 좌경을 하면 집단을 해칠 수 있고 집권당이 좌경을 하면 인민을 잃어 혁명을 망칠 수 있다는 진리를 명심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도 고수할 수 없다. 이것은 반민생단투쟁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며 좌경의 침해로 하여 막대한 출혈을 당한 일련의 나라들에서의 뼈아픈 체험이 전세계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호소이다. 초당적인 언행으로 가리워진 좌경을 반대하고 경계하며 그 침해로부터 사람들의 정치적 운명을 보호해주는 것은 정권을 잡은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의 활동에서 한시도 놓치지 말고 틀어쥐고나가야 할 영원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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