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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08 06:59
초자연적 인격신이 없어도 종교생활은 가능하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초자연적 인격신이 없어도 종교생활은 가능하다.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최근에 도올 김영옥선생이 최제우선생이 쓴 [동경대전]을 해설하는 강의를 하다가 초자연적 인격신이 없어도 종교생활이 가능하며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할 때 인간은 가장 <종교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종교>란 <초자연적 인격신>에 대한 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종교적 경험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미국 철학자 죤 듀이(1859~1952)는 <종교(religion)>와 <종교심(religious)>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종교>란 항상 제도적 체계를 가진 독특한 신앙 신조들과 실천사항들을 의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심>이란 어떤 제도적 실체나 신앙 신조의 체계를 뜻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모든 인간의 이상(ideal)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뜻한다”([공통의 신앙], 1934, 9~10페이지).

듀이는 인간 공동의 그리고 자연스러운 관계와 동떨어진 초자연적 종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파괴하고 격리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듀이는 현 제도적 종교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지만, 인간의 경험 속에 내포된 <종교심>에 대해서는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종교심>이란 <경험의 질적인 내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우리가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느냐 하는 <적응력>, <새로운 방향감각>, 그와 더불어 얼마나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주느냐 하는 영향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독특한 경험이 질적으로 종교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초자연적 인격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그 삶의 조건에 얼마나 인간 유기체가 잘 적응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 전반기에 이룩된 여러 과학적 발견들과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죤 듀이를 비롯한 자유종교운동가들은 이제 더는 <초자연적인 인격신 중심의 신앙>에 머물지 않고 <인간 중심의 종교적 휴머니즘>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2년~33년 겨울 죤 듀이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시카고 인본주의자들이 모여 [인본주의 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 세계를 통하여 종교적 신앙에 관한 근본적인 변화를 널리 인정할 때가 왔다. 전통적인 종교적 태도를 단지 일부 수정하던 때는 지났다. 과학과 경제의 변화는 낡은 신앙을 붕괴시켜 버렸다. 전 세계의 종교들은 오늘날 거대하게 증가하여온 지식과 경험으로 야기된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 적응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오늘날 인간활동에서 가장 긴요한 운동은 모두 솔직하고 명백한 인본주의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들은 <종교적 인본주의>를 좀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하여 몇 가지 증언을 선언하기로 했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종교>란 말을 20세기의 인간의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푸는데 아무런 힘도 없는 무의미한 <교리>나 <도그마>와 일치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가 항상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의 우주에 대한 넓은 이해와 과학적 업적, 그리고 종족, 색깔, 성별에 관계없이 인류의 <형제애>에 대한 깊은 이해는 새로운 종교에 관한 정신적 지침을 요구하게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감하고 솔직한 <인본주의 종교>는 과거의 도그마와 교리 위주의 형식적인 종교와 손을 끊고 현실적이고 타당한 사회목표와 개인의 삶의 만족을 위한 목적을 제공했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본주의적 종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우주를 창조된 것으로 보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1.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끊임없는 과정의 결과로 세상에 나타난 것으로 믿는다.

2. 그들은 전통적인 몸과 마음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거절하고 있다.

3. 그들은 인간의 종교적 문화와 문명은 인류학과 역사가 밝히고 있듯이 인간의 자연환경과 사회적 유산과의 상호관계로 점차 발전되어온 산물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어떤 특수한 문화권 속에 태어난 개인은 주로 그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4. 이들은 인간 가치의 어떠한 초자연적이고 우주적인 보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이들 역시 이 우주 속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미발견물들은 <초자연적인 인격신>에 의해 서가 아니라 <과학정신>과 <지성적 탐구>에 의해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5. 이들은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도 없다고 주장한다.

6. 이들은 예배와 기도에 대한 종래의 낡은 태도를 버리고 인간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공동의 헌신 속에서 강한 <종교심>을 발견한다. 이들은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소망에 어떤 기대도 하고 있지 않다.

7. 이들 인본주의적 종교인들은 개인의 이익추구에 바탕을 둔 비인간적인 경제구조를 타파하고 공평한 경제분배가 가능한 <집단경제 체제>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8. 그들은 기성 기독교회가 삶을 부인하는 것을 비판하고 삶을 긍정하고, 삶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기보다는 가능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며, 극소수자들의 이익추구에 헌신하지 않고 모든 인류의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노력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이들 인본주의자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신조를 창조해내려고 시도한 것이 아니라 발전적 사고방식을 종교생활에 표현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어떤 독특한 종교의 교리나 초자연적 인격신에게 헌신하는 것만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내용> 속에 종교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각자가 민주주의, 정의, 평화, 평등, 자주, 등과 같은 포괄적 이상(ideal)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통일을 이루는 곳에는 <종교적인 경험의 질적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고 죤 듀이는 보았다.

사실상, 이들 인간적인 이상들을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자기 생명을 내놓을 때도 있어야 하고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죤 두이는 그의 책 [공통의 신앙] 27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심>, <영적인 내용>을 정의 내리고 있다.

“Any activity pursued in behalf of an ideal end against obstacles and in spite of threats of personal loss because of conviction of its general and enduring value is religious in quality.<어느 한 이상적 목적이 지닌 그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 때문에 많은 장애물과 개인적인 손실에 대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추구되는 어떤 활동도 질적인 차원에서는 종교적(영적)이다. (위 책 27페이지)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이상적 목적(ideal end)을 실천하기 위하여 해방 후 김구, 여운형, 등 얼마나 많은 애국자가 생명을 바쳤으며, 그 후 4.19와 5.18, 6.29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이남의 청년들과 진보적 인사들이 감옥에 가고 어려움(obstacles)을 당했으며 심지어 생명까지도 잃었(personal loss)는가? 얼마나 많은 애국자가 <조국통일>이라는 이상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하다가 국가보안법에 걸려 감옥에 가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었는가? 전태일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이상적 목적을 실현하려고 헌신하다 생명까지 바쳤다. 듀이는 이러한 <인간적인 이상들>을 실현하기 위여 헌신하는 모든 활동을 다 <영적인 종교적 활동>이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에만 [영적인 것], [종교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다.

죤 듀이처럼 인간 유기체와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종교심>을 해석하게 되면 여러 종교적 신조나 도그마, 그리고 여러 사상, 철학, 이념으로 분열된 집단과 집단,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장벽을 허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서로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고 남과 북으로 70여년 동안 분단된 코리아의 현실 속에서 <인간이 더 나은 자연과 사회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인간의 이상에 헌신하는 곳에는 종교적 가치가 있다>고 듀이처럼 해석하게 되면 반드시 이북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비판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북도 인류의 생명인 <자주성>이라는 이상적 목적(ideal end)을 추구하고 있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사회주의>라는 이상적 목적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지극히 “종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북 사람들은 모두 분단된 우리 코리아 민족의 지상과제(ideal end)인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으므로 아주 종교적이다. 이들 이북 민중들은 <자주성>과 <사회주의>라는 이상적 목적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연합세력들과 이남의 보수세력들로부터 항시적으로 전쟁과 경제제재, 정권붕괴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이상적 목적인 <자주성>과 <사회주의>, 그리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으니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종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죤 듀이가 강조하는 <경험의 질적 내용>으로 종교심을 보게되면 이북 사람들도 모두 종교적이고 영적이다. 그러니 이북에 종교의 자유가 있느니 없느니 시비할 필요도 없고, 이북이 기독교 신을 믿지 않는다고 이북 사람들을 <적그리스도>로 몰아 적대관계를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본다. 듀이가 강조하듯이 <경험의 질적 내용>으로 <종교심>을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남과 북이 공통으로 가져야 할 자세이다.

최제우선생은 일찌기 기독교의 독선적인 <문화제국주의적> 성격을 파악하고 여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동학>을 제창하였다. 기독교는 오직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을 절대화하며 다른 종교를 배척해 왔다. 코리아 반도의 한울타리, 더 나아가 세계의 한울타리 아래에서 인류는 누구나 동등하고 차이가 없다고 믿은 최제우선생이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고, 성경만이 진리가 들어있는 유일한 책이고, 기독교회만이 신성한 곳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즉 서학을 반대하고 동학을 옹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민족은 처음부터 개인 중심이 아닌 <공동체 중심>의 사회 속에서 온 마을 온 나라 문제를 서로 걱정하며 공동으로 해결하며 살아온 민족이다. 그리고 <이원론>이 아닌 <천지인 합일 정신>을 강조한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소유한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언제부터 우리 코리안들이 서구 자본주의의 개인 이기주의에 물들어 개인 이익만 추구하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전 <사회의 구원>이 아닌 <개인 구원>만을 추구하는 종교적 이기주의에 빠지고 말았단 말인가? 기독교 신앙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지극히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띤 독단적 종교의 신은 우리 코리안들에겐 용납될 수 없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유신론자, 무신론자, 사회주의자들, 불가지론자, 인본주의자들, 모두가 모여 <비인간적인 사회제도>를 변혁시키기 위하여 서로 자극하고 서로 격려하며 인류멸망을 막고 더욱 인간다운 복지사회를 이룰 수 있는 그런 광장으로서의 교회가 필요할 뿐이다.

나는 긴 과정을 거쳐 독단적이고 문자주의적인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에서 해방된 후 1983년 코리안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니테리안 유니버설리스트 교단(Unitarian Universalist Association)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내가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한 로스엔젤레스 제일유니테리안교회(The First Unitarian Church In Los Angeles)에서는 매주 수요일이면 수석목사인 즈월링 목사, 부목사인 나와 교육목사, 인턴목사, <사회정의구현회> 회원들이 로스엔젤레스 거리에 있는 <연방 이민국빌딩> 앞에 나가 시위를 하였다. 그때그때 외치는 구호와 들고 선 선전 내용은 달랐다. 예를 들면, <미국은 쿠바와 니카라과에서 손을 떼라>, <더 이상 새로운 무기를 만들지 말라>, <택시노조를 지지한다>, <게이와 레스비안의 권리를 인정하라> 등이었다. 로스엔젤레스 제일유니테리안 교회의 수석 목사인 즈월링 목사는 가끔 새로운 무기를 전시해 놓은 장소에 사회정의구현회 회원들과 참석하여 일부러 법을 어기고 무기를 전시한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체포되어 구금되곤 하였다. 그러면 교인들이 경찰서로 찾아가 <우리 목사를 석방하라>고 외쳐대었다. 유니테리안 유니버설리스트 목사와 교인들에게는 이런 활동도 종교활동 중 하나였다.

또한, 사회정의를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엘에이시를 방문하면 그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설교를 하게 하는 것이 우리 목사들의 큰 업무 중 하나였다. 그리고 버트런드 러셀의 생존 시 그를 비롯하여 세계의 석학들이 UCLA에 학회 일로 방문할 경우 그들을 교섭하여 우리 교회에서 일요일에 설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월 1일 노동절에는 노조 회장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전공하는 교수를 초청하여 설교를 듣곤 했다. 또한, 콜롬비아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는 그룹에 들어가 3년간 같이 먹고 살면서 활동하다 돌아온 블레이스 본페인 신부를 초청하여 콜롬비아의 정치적 현실에 대하여 설교하는 날에는 엘에이 시의 관심 있는 일반시민들과 진보적인 인사들과 그룹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교회가 유엔과 같다. 예배가 끝나면 교회 내의 각처에서 인권운동가들, 반전평화운동가들, 여성해방 운동가들, 무기 반대 운동가들, 게이 레즈비언 옹호자들, 등이 조그마한 테이블을 갖다 놓고 자기들의 조직을 소개하는 내용과 그들의 활동계획을 알리는 팸플릿을 전달한다. 이것도 우리의 종교활동 중 하나였다.

유니테리안 유니버설리스트들은 이러한 인간적인 이상(human ideals)인 평화, 정의, 민주주의, 자주, 평등, 화해, 사랑, 진리를 위하여 행해지는 모든 활동을 질적인 차원에서 지극히 종교적이고 영적이라(very religious, or spiritual in quality)고 죤 듀이처럼 생각하고 있다.

나는 로스엔젤레스 제일유니테리안교회에서 설교 되는 설교, 혹 연설을 듣고 감동되어 눈시울을 적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보고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에 참석한 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영적인 것>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하고 독단적인 종교의 도그마에서 해방한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1983년 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면서 교회와 맺은 계약서의 첫 조항에는

"이 교회에서 어떤 설교를 하든지 문제 삼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이 조금 다르다고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싸움질을 하며 서로 이단이라고 몰아내는 데 로스엔젤레스 제일유니테리안 교회에서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던지 문제 삼지 않고 있다. 나는 이 교회에서 여러 번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 나는 이 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기독교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교회의 특이한 것은 누가 설교를 하든지 반드시 질의 응답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주장만 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반드시 대중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일반 대중들이 그것을 가치로 인정하는 <보편성>을 띠어야 하고 <영구성>을 띠어야 진리로 인정될 수가 있다.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에서 <질의 응답 시간>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 아닌가! 미국이나 이남의 기독교회에서 예배 후 설교에 대하여 질의 응답을 하는 교회가 있는가?

이처럼 유니테리안 유니버설리스트들의 종교활동은 사회정치적으로 교인들을 깨우쳐 사회정치적 현실을 올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 자기 종교의 교리를 절대화하여 단지 선교활동에 교인들을 동원하여 교회 성장에나 힘쓰거나 교인들을 <죄인>이라고 몰아 죄를 씻고 천당에 가기 위해서는 헌금을 많이 내야 한다고 부담을 주어 헌금이나 많이 거두어들여 교회건물이나 크게 짓는 것이 종교활동이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어느 지역에 전쟁이 일어나면 구호물자나 들고 들어가 선교나 하려는 선교지상주의 교회는 전리품이나 도둑질하는 도둑놈들과 무엇이 다른가? 유니테리안 유니버설리스트들의 선교활동은 그들의 이웃 중 고통받는 사람들과 세계의 나라 중 고통받는 나라들의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유니테리안 유니버설리스트들의 종교활동은 미리 전쟁을 막는 일이다. 전쟁은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다 파괴해버린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 구호물자를 들고 들어가 선교하는 것이 종교활동이 되어서는 안된다. 독단적 근본주의 기독교인인 부시 대통령이 평화스럽게 잘 사는 이라크 민중들을 전쟁으로 몰아 수없이 죽이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나서 하는 소리가 <그들을 민주화하기 위하여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2차대전 후 남은 낡은 무기들을 소모하기 위하여 저질러진 죄악 중의 죄악인 6.25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코리아에 구호물자를 들고 들어가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는데 가장 성공한 예가 있으니까, 코리아의 예처럼 세계 각처에서도 그런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제국주의의 본심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악의 근원인 전쟁을 미리 막는 일이 종교의 활동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폭탄을 퍼부어 선량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고 무기를 팔아 돈을 버는 자들이 기독교회에 나가 헌금을 많이내고 장로가 된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종교는 죄악의 근원인 전쟁을 막는 데 앞장서야 한다.

나는 지금도 매주 일요일 로스엔젤레스 제일유니테리안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교인들과 함께 암송하던 [신앙고백]을 외우곤 한다.

우리는 항상 깨어 바른 통찰과
올바른 역사인식과 창조적 정신으로 이웃과 인류에 봉사하며
사랑과 화해와 정의가 곳곳에 넘치도록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교리이며
진리탐구가 성만찬이며
봉사가 기도이다.
우리는 함께 평화스럽게 살며
자유스럽게 지식을 찾고
공동으로 인류에게 봉사할 것을 서로 언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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