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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18 00:00
이북에서 내가 목격한 <참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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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이북사회가 내가 60여 년간 살아온 이남과 미국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북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남이나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항상 궁금해하며 사색을 계속해 왔다. 체제가 다른 사회에 살면 인간도 달라지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생활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한편 체제가 같은 사회에 살면 아무리 개인이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여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래 동안 기독교를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색다른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새벽기도도 한동안 열심히 하여 보았고 부흥회도 열심히 다녀보았고 성경학교도 다녀보았다. 그러나 기도할 때나 부흥회 때 회개하고 결단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교회 밖을 나오면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현실은 전에처럼 그대로 물질화폐관계로 냉정하게 인간관계가 이루어져 있었고 가난한 나의 가정형편은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교회 내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데 실망하였다. 결국 교회도 그것이 존재하는 사회의 체제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 체제에 순응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사회체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면 교회자체가 분열되어 교회가 운영되기 힘들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신앙생활 따로, 실제적 생활 따로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북의 주체사상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격적 가치>가 <교환가치>로 전환되고 인간의 인격이 "돈과 재물에 의하여 평가된다."고 지적했는데 참으로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내부적으로 아무리 고상한 신앙심을 갖고 있거나 고상한 사상을 지닌 사람도 인격이 무시되기 십상이다. 지금 자본주의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이 갑자기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자기들이 돈이 있을 때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친구들도 많았는데 갑자기 직장을 잃자 가장 친한 배우자, 자식들, 친척들, 친구들이 모두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게 되니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이 땅에 천국건설을 외쳐왔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은 비인간적인 체제를 바꾸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순응하면서 집단구원이 아닌 개인의 기복신앙에나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마치 삐뚤어진 의자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삐뚤어진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사람만 고치려는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은 마치 폐병환자에게 폐병치료는 하지 않고 폐병때문에 자주 걸리는 감기나 몸살이나 치료하는 것과 흡사하다. 사실상 기독교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적 요구인 "집단적 구원", 혹 "사회적 구원"보다는 사적 소유에 기초한 개인주의를 지향하다보니 "개인의 구원"에 더 치중했기 때문에 여기 지상에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는데 실패하였다고 판단된다. 덴막의 철인 키엘케골은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인간 각자 "신 앞에 선 단독자"로써 주관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사회성과 합리성을 부정했다.

나는 이북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차츰 서서히 이북의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처음에는 겉모양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처음에 사물의 겉이 보이고 나중에 속이 보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우선 그가 어떤 옷을 입었나를 보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 나를 보며 다음에 어떤 집에 사느냐를 본다. 인간이 "인격"으로가 아니라 "물질"로 평가되도록 사회 환경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래 동안 다른 사람을 사귄 다음에야 그 사람의 됨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북을 방문하는 재미동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우선 자기들이 미국에 살면서 익숙하게 된 <물질적 가치관>으로 이북을 평가한다. 이들은 못산다, 잘산다는 가치척도를 물질, 돈에다 두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북의 지도원들에게 재미동포들이 이북을 방문하여 처음에 무슨 비평을 하건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재미동포들이 오래 동안 자본주의 체제에서 물질화폐관계로 사물을 판단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북사회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외부를 먼저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북의 주민들을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동안 종교와 철학, 사상을 연구해온 사람으로 이북을 방문할 때도 항상 이북이 지향하는 지도사상이 무엇이며,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관계는 어떤가,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은 어떤지, 문화종교생활은 어떤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관찰과 사색을 해왔다. 사람들이 잘살고 못산다는 의미가 단지 물질에만 있다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물질은 단지 잘 살기 위한 인간의 객관적 조건에 불과하다. 객관적 조건인 물질이 주체적 존재인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나는 이북에 있는 나의 가족들인 두 고모들과 그 자식들(나의 고종 사촌들), 그리고 외삼촌과 그 자식들(외사촌들)을 자주 만나고 그곳의 지도원들과 식당과 호텔에서 일하는 여러 봉사원들을 만나면서 그곳의 인간들 사이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품성, 인간됨됨이가 어떤지를 세밀히 관찰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남과 미국에서 이북의 공민들처럼 그러한 <순수한 인간들>을 만난 적이 없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다른 동물과 다른 원래 인간인 "종족인간"(species-being)을 이북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재미동포들처럼 돈, 자본, 물질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런 것들 때문에 인간성을 상실하는 경우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이 바로 하늘(인내천)이라고 믿고 인간을 하늘처럼 대하는(이민위천) 이북의 민중중심의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인간이 상품화 될 수 없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우리의 누이들이 미군의 노리개로 딸라에 사고 팔리는 것을 매일 목격하였고 인간의 신성한 노동력마저 값이 매겨져 사고 팔리는 것을 매일 보며 살아왔다. 지금도 서울에서는 쇼 윈도우 속에 여성들을 나체로 진열해 놓고 몸을 팔게 하는 공창이 존재한다고 최근 이남신문이 보도한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유럽에서는 여러 곳에 그러한 공창이 존재한다고 한다. 아직도 로스엔젤레스 시의 여기저기에 인간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씩에 노동현장으로 팔려 나가고 있고 그것도 안 되는 사람들은 그날 점심과 저녁을 먹여주는 조건으로 팔려 나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건축재료상인 홈 데포(Home Depo)의 앞에 가면 라티노 노동자들이 줄을 서서 일하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북 사회주의사회처럼 인간이 상품화되지 않고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 살다 보면 이북에서 내가 목격한 <원초적 인간형>이 나온다고 생각된다. 맑스가 강조한 <소외되지 않은 인간>을 이북의 인간들 속에서 발견한다.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 단지 생산력을 높여 자본주의사회보다 더 물질적으로 잘 살자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에 지적한 소외되지 않은 <원래의 인간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이 원래는 집단주의적 존재, 즉 "사회적 존재"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여유식량이 생기면서 그것을 더 점유한 계급이 생기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면서 <개인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사적 소유의 산물인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는 결국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열되어 소수의 생산수단과 정권을 잡은 지배계급이 대다수의 민중을 착취하고 압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적 소유제도에 근거한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한 이북같은 사회주의사회는 인간을 <개인적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로 환원시켜 놓았다.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은 인간이란 <개인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지금 민족적 단위, 민족국가단위로 각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있고 생활하고 있는 현실상황에서 민족이라는 집단을 떠난 개인의 생활이란 사실 불가능하다. 개인은 자기가 혼자, 혹은 핵가족 중심으로 자기가 벌어 먹고 살아가고 있으니 집단이 뭐가 필요하며 민족이 뭐가 필요하냐고 말 할 수 있으나 인간은 주체사상이 강조하듯이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활동하여야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고 집단적 협력에 의해서만 자연과 사회를 개조할 수 있으며 자주적 요구를 실현 할 수 있다.

이북은 인간의 "본성적 요구"인 "집단주의"를 지향하는 사회, 즉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인간을 이기적이고 뒤틀린 "개인주의적 존재"에서 원래의 "사회적 존재"로 되돌려 논 것이 이북사회주의 사회의 특징이라고 보겠다. 그리하여 이북에서는 "내 땅, 내 집, 내 공장, 내 농장, 내 도서관" 대신에 "우리 땅, 우리 집, 우리 공장, 우리 농장(협동농장), 우리 도서관( 인민대학습)," “인민문화궁전,”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고 실제로 모든 중요한 소유가 민중 전체의 것이다. 이북의 사회주의헌법 제2장 제20조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

물론 여기서 "국가소유는 전체 인민의 소유이다."(제21조)

이처럼 이북 사회주의사회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개인주의를 낳는다고 보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자체를 공유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인 사회성, 사회적 존재를 되찾아 주었다.

그러면 다음으로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데 어떤 사회적 존재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고 지적한 것은 사실 맑스주의에서도 강조되었다. 맑스주의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인간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고 밝힌 것은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 처음이다.

인간도 <물질적 존재>이지만 다른 어느 물질적 존재보다도 <발전된 유기체>를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뇌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물을 <반영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다른 물질과 달리 뇌수가 현실을 반영한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발전된 유기체와 그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뇌수는 단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갖게 하는 "생물학적 바탕," 즉 객관적 조건에 불과하다.

그 자체가 사람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회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사회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이 바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고 주체사상은 밝히고 있다. 주체사상은 인간이 뇌수의 기능인 "의식을 가지고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본능에 의하여 움직이는 동물과 질적으로 구별된다."고 지적하였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역사는 결국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발전역사"이며 인간은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귀중하고 힘있는 존재," "세계의 유일한 주인, 유일한 개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렇게 귀중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단지 "물질적 생산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상품으로 매매되는 노동력을 소유한 하찮은 존재"로, 또한 "황금에 의하여 지배되는 무기력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체사상은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주체사상은 인간을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정의 내림으로서 그 동안 착취사회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의 본성"을 되찾아 주었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대한으로 높여 주었다. 참으로 이북의 사회주의사회는 앞에서 강조했듯이 인간을 자본이 아니라 인격으로, 즉 인간의 됨됨이(what he or she is)로 평가하는 원래의 인간가치로 되돌려 놓았기에 이북 주민들이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 물론 지금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완성된 단계는 아니지만 원초적 인간을 향하여 나아가는 참인간을 이북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인류에게 일말의 희망을 던져주는 일대 사건이라고 본다.

[직성 :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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