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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6 13:02
이산가족들에게 시간이 없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이산가족들에게 시간이 없다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정부대책이 시급하다.
 
 
 
김현환(재미동포서부지역연합회 회장)
 
 
나는 며칠 전 2014년 6월 초에 다섯 분의 재미동포 이산가족들을 모시고 이북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일행 중 한 분은 82세이고 세 분은 모두 80이 가까운 70대의 노인들이고 나머지 한 분은 일행 중 한 분의 딸로 40대이다. 그리고 안내자인 나는 두살 모자라는 70세이다. 우리 조국방문단 일행들은 인천과 심양을 거쳐 긴 여정 끝에 평양에 도착하여 해방산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산가족인 나를 비롯하여 여섯 명은 해방산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북조국에서 가족을 찾아주고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족지도원을 만나 개별적으로 상담하였다. 이번 방문에서 우리가 어느 가족들을 만날 것인지, 만나기를 희망하는 가족들은 다 생존해 있는지를 상담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일행 중 한 분인 74세의 홍 여사가 2살 위인 오빠를 만나러 좋은 약들과 옷, 과자, 사탕, 등을 잔뜩 싣고 평양에 왔는데 오빠가 바로 40일 전에 사망했다는 청전 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것이다. 홍 여사는 나에게 달려와 눈이 벌게져 말을 더듬으면서 자기 오빠가 40일 전에 사망했다고 하더라면서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나에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아마 이북에서는 오빠가 돌아가셨지만 다른 가족들이 살아 있으니 그냥 홍 여사를 방문하도록 한 것 같다고 나는 대답하였다. 홍 여사는 지금 당장에라도 자신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절망하여 말했다. 조카와 올케가 온다지만 자신은 오빠를 만나러 왔지 조카나 만나 뭐하느냐며 홍 여사는 내 앞에서 울먹이며 나를 공격했다. 나는 이때부터 죄인이 되어 홍 여사의 눈치만 보는 신세가 되었다.
 
이번에 평양을 방문하는 이산가족들은 나와 함께 이미 두 차례 이상 이북을 방문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시내 참관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였다. 나는 가족지도원에게 부탁하여 가능한 한 속히 가족들을 평양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였다. 평양 시내 참관은 처음 조국을 방문하는 40대 여성인 에스더에게만 시켜달라고 안내원들에게 부탁하였다. 2세인 에스더가 우리 말이 서툴러 외국어대학을 나온 여성 통역관 지도원이 나와 동행해 주었다.
 
도착한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러 모두 식당에 모였다. 홍 여사는 사망한 오빠를 생각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잠겼고 식사도 별로 하지 못했다. 나는 홍 여사에게 그래도 조카와 올케가 오지 않느냐, 조카가 아버지를 잃고 얼마나 고모가 보고 싶었겠냐고 말하면서 위로하려 했으나 내 위로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딸 에스더를 데리고 가족을 만나러 온 박 장로님이 홍 여사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의 말을 하였다. 자기가 우리 말도 잘하지 못하는 딸을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이 늙어 더는 평양을 방문하지 못하거나 사망했을 경우라도 자기 남 동생의 자녀들, 즉 에스더의 사촌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알게 하여 서로 계속하여 만나도록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서 라며 홍 여사도 이번에 조카를 만나고 정을 붙여 앞으로 미국에 사는 홍 여사의 자녀들과 서로 계속 만나도록 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해주었다. 나는 박 장로님이 참으로 고마웠다. 나도 홍 여사에게 내가 이북을 방문하여 만나는 가족들은 나의 직계는 하나도 없고 외삼촌과 그 자녀들, 그리고 사망한 두 고모의 자녀들, 즉 나의 고종사촌들이라고 강조하여 말해주었다. 사촌 누이동생들을 만날 때면 “오빠!“ 하고 나에게 매달릴 때 짜릿한 핏줄의 감정을 느낀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홍여사는 박장로님과 나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오빠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틀간 푹 쉬고 나니 사흘째 되는 날 가족들이 모두 도착하였다. 나에게도 고종사촌 누이동생 순덕이가 평안북도에서 남편과 함께 도착하였다. 순덕이가 눈시울을 적시며 “오빠!”하고 나에게 안길 때면 내 가슴이 져러옴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핏줄의 신기함을 느끼게 된다. 순덕이는 나의 고모(나의 아버님의 여동생)의 딸로 일년에 한 번은 꼭 만난다. 나는 순덕이와 자주 만나니 점심만을 함께하고 아쉽지만 이별을 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자 각각 다른 식탁에 가족끼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각 테이블의 가족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였다. 모두 내가 자기 가족들을 모시고 오느라 수고했다고 고마워 했다. 가족들이 대부분이 내가 만난 적이 있는 분들이었다. 양강도의 도청소재지인 혜산에서 온 이 박사님의 여동생이 나에게 언니를 모시고 오느라 수고했다고 손을 꼭 잡고 인사를 하였다.
 
나의 처와 친한 이 박사님은 내 처를 만날 때마다 언제 김 목사가 이북에 가느냐고 묻곤 하였다. 내가 올해 6월에 국토종단을 하러 간다고 하니까 자기도 이번에는 꼭 김 목사를 따라가겠다고 신청서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박 장로님에게 연락하여 박  장로님도 신청서를 보내오고 박 장로님은 이번에 딸 에스더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여 기본적인 이산가족방문단이 결성되었다. 거기에 20여 년 전에 나와 함께 이북을 방문한 홍 여사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조 선생님이 함께 하여 나까지 모두 6명으로 서부 이산가족 조국방문단이 결성되었다.
 
이 박사님은 1980년대에 캐나다를 통하여 힘들여 여동생을 찾았다고 했다. 이북에서는 이름의 끝에 <자> 자가 들어가는 이름들은 일본식 이름이라  모두 개명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개명을 한 여동생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겨우 동생의 주소를 찾아 1980년대에 혜산까지 찾아가 동생을 만났다. 그다음 해에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동생을 찾아갔는데 어머니가 동생이 너무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을 닮지 않았다고 딸로 인정을 하지 않아서 이 박사님의 마음고생이 컸다고 했다. 그러나 그다음 방문에 어머니가 다시 동생을 만나고 나서는 차차 어머니도 동생을 딸로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핏줄은 땅기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동생분은 혜산에 살지만 김 목사선생이 조국을 방문할 때마다 노동신문에 이름이 나기 때문에 늘 소식을 듣고 있었다고 했다. 내 이름을 신문에서 볼 때마다 언니가 언제 다시 조국을 방문하나 늘 기다렸다고 했다.
 
홍 여사의 식탁으로 가니 홍 여사와 똑 닮은 여조카와 올케가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했다. 조카가 홍 여사를 빼닮았다. 나는 조카에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참으로 안 되었다고 인사를 하였다. 오빠를 잃은 홍 여사는 아직도 마음이 굳어 있었다. 홍 여사는 1992년도에 이북을 방문하여 오빠를 만난 후 20년 후에야 오빠를 찾아온 것을 후회하였다. 왜 진작 더 자주 오빠를 찾아오지 못했는지 오빠를 잃고서야 후회가 된다고 울먹였다. 그렇지만 홍 여사도 조카와 올케를 만난 후 많이 풀렸다고 이 박사님이 나에게 귀띰해 주었다.
 
20년 전 나와 함께 조국을 방문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82세의 조 선생님은 누나와 누이동생 하나가 이미 사망하였고 누이동생 한 분만 평양에 살아 있었다. 그 누이동생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와서 인사를 하였다. 그 남편은 유명한 인민군 군악대의 지휘자로서 어느 연회에서 나를 만나 나에게 인사를 한 적이 있다고 했지만 나는 기억이 없었다. 조 선생님도 누님을 꼭 만나고 싶었는데 사망했다고 하니까 실망하여 한동안 말이 없으셨으나 그래도 막내 누이동생 가족들을 만나고 나서 많이 풀렸다. 조 선생님은 허리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셨고 심장 수술도 받으셔서 몸이 아프신 분이였다. 나와 조 선생님이 엘에이 공항에서 만났을 때 부인한테서 나에게 전화가 왔다. 부인은 남편이 병자이니까 잘 부탁한다고 하면서 제발 건강하게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박 장로님의 남동생은 황해도 강령에 살고 있는데 끌끌한 두 아들과 딸 하나와 함께 평양에 왔다. 에스더도 처음으로 사촌 형제자매를 만나 반가워하였다. 말이 안 통하니 박 장로님이 통역을 했다. 동생분이 옹진반도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인 강령에 대하여 자랑을 많이 하였다. 수산물도 풍부하고 텃밭이 넓어 채소를 사 먹은 적이 없다고 했다. 72세인 그는 아직도 건강하여 손수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이번이 세번째 형님과의 상봉이다. 그는 형님과 자주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뻐서 어쩔 줄울 몰라 했다.
 
일행 모두가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기에 나는 혼자 조용히 대동강을 걷기도 하고 방에 있는 텔레비젼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주체사상 학자도 만나 내가 궁금해하는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틀간 조카와 올케를 만나고 홍 여사는 가족들을 보냈다. 다른 분들은 모두 평양을 떠날 때까지 계속 가족들과 함께 호텔에서 지냈다. 그런데 조카와 올케가 돌아간 지 하루 되는 날 갑자기 홍 여사가 내 방으로 와서 조카를 다시 불러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자기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난감하였다. 나는 가족지도원에게 전화하여 홍 여사의 뜻을 전했다. 지금 다시 절차를 밟아 조카가 있는 신의주로 통지를 보내도 조카가 해당 기관에 찾아가 절차를 밟아 평양으로 오려면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홍 여사는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러면 홍 여사 자신이 신의주로 가는 방법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안내원이 함께 가야 하는데 평양에 있는 일행들을 돌보아야 하니까 그것이 쉽지 않았다. 홍 여사는 조카를 보내놓고 가만히 생각하니 올케를 위해 뭔가 더 해주고 싶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카가 아픈데 나중에 나를 통해 약을 보내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언제든지 부탁만 하면 심부름을 해주겠다고 대답하였다. 홍 여사가 이제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인 조카가 마음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처음에 도착하여 가족지도원으로부터 오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기가 막혀 짐을 그대로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나에게 고백하였다. 정작 조카와 올케가 왔지만 짐을 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오빠를 더 잘 돌보아 주지 않고 빨리 죽게 한 올케도 미웠다고 했다. 사실은 홍 여사 자신이 더 빨리 오빠를 만나러 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 좀 더 일찍 자주 오빠를 방문하여 도와주지 못했나 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이 박사님은 몸이 좋지 않아 호텔 방에서 여동생과 함께 조용히 지냈다. 식사시간에만 식당에 나타나 식사를 하고는 계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실상 이 박사는 건강이 좋지 않아 조국방문을 몇 번 연기하였었다. 만약에 자신이 못 올 경우를 생각하여 여동생을 보내려고 조국방문신청서를 내어 비자도 받아두었다. 이 박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돈을 내고 2등 칸 비행기를 타고 조국을 방문하였다.
 
이산가족 방문자들은 건강이 제일 큰 문제이다.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들이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는 것이다. 연로하신 몸에 무거운 가방을 부치고 들고 하여 그 힘든 서울과 심양을 거쳐 평양에 도착한다. 평소에는 혼자 들기 힘든 가방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면서 무거운 짐들을 가지고 와서 가족들에게 전달한다. 가족들이 다 떠나고 나면 그때부터 긴장이 풀리면서 병이 들기 시작한다. 우선 찾아오는 것은 몸살감기이다. 그래도 살아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들은 버틴다. 마침내 미국 집으로 돌아와서는 콧물 눈물 흘리며 거의 모두 한 달씩 앓는다.
 
나와 함께 북에 두고 온 자식들과 부인을 만나러 다니던 나의 노인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는 겨우 몇 분들이 형제자매를 만나러 다닌다. 이번 가족방문자들도 에스더만 빼면 다 남동생과 여동생, 오빠를 만나러 간 분들이었다. 이들도 하나씩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고 그러면 이산가족사업도 종말을 고할 것이다. 박 장로님은 이것을 내다보고 자신의 장녀인 에스더를 설득하여 사촌 형제들을 만나러 평양에 데리고 갔다. 홍 여사는 자신이 죽으면 미국에 사는 자신의 자식들이 이북의 조카를 만나러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산가족 사업도 이제 대를 잇는 사업이 시급하다. 에스더는 이북에도 자기와 핏줄이 같은 사촌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하는 것 같았다. 에스더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계속 이북의 사촌 형제자매들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이 경우는 사실상 아주 드문 경우다. 박 장로님이 이러한 부분에서 본다면 아주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일주일이 금세 갔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가족들과 이별하고 심양으로 나와 바로 인천으로 나왔다. 다른 분들은 모두 이남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로 나갔으나 나는 5년 전부터 입국이 금지되어 공항 내의 환승호텔에서 하루 자고 아침에 KAL 라운지로 들어가 어머니를 비롯하여 누님과 동생들에게 전화했다. 재미동포들의 이산가족들을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나는 정작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나는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김포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못 만나고 공항 내에 갇혀있으려니 가슴이 아려왔다. 내가 조국통일운동에 헌신한다고 죄인으로 취급하며 어머니 마저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이남정권은 북의 <인권>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이번 가족방문자들이 모두 무사히 가족들을 만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있다. 70을 바라보는 나도 참으로 힘이 드는데 82세의 조 선생을 비롯하여 70 중반의 다른 분들이 얼마나 힘들까 능히 짐작이 간다. 아마 이들은 모두 지금 앓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 또 조국을 방문하여 가족을 만날 수 있느냐고 나를 독촉할 것이다. 이산가족들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 그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대동강변에서 산책하는 가족방문 일행
 
용악산에서 야외점심식사하는 방문단 일행
 
평양시의 새모습(창전거리와 류경호텔)
 
조국통일 3대헌장탑 안쪽 벽: 통일을 염원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 대리석 타일들
 "애국 애족 애민의 사상으로 조국을 통일하자"라는 필자의 글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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